1505.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12일
어제 저녁에는, <뉴스1>의 이길우 기자가 최진석 교수를 인터뷰한 내용을, 길지만 두 번이나 읽었다. 거기서 만난 흥미로운 것 다섯 가지를 공유한다.
1.우리가 소크라테스에게 열광하는 것은 인간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철학자 소크라테스이다. 철학자와 한나절을 만나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하면, 애플의 모든 기술을 줘버리겠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철학자의 도움을 받아 시선의 높이를 최고 도로 높이면,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기업이든, 국가이든, 개인으로 어느 누구든지 각자가 가진 시선의 높이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없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시선은 인간이 지적으로 가질 수 있는 시선 가운데 가장 높다. 시선의 높이에 따라 영향력과 통제력이 달라진다. 나는, 사람들이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으면, 그냥 시선의 높이가 낮구나 하며 말하기를 그칠 생각이다. 시선의 높이 따라 영향력과 통제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선이 높으면 영향력과 통제력은 커진다. 철학적 시선과 인문적 시선은 같은 말이다. 둘 다 인문적 소양이 많은 시선이다. 인문적 소양은 선도력을 키워준다. 선도력을 발휘하는 나라는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이고, 선도력은 상상력과 창의성에서 시작한다. 상상력과 창의성은 지적인 활동인데, 이는 인문적 시선의 높이에서 나온다.
2.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이 말은 100% 다 맞는 말은 아니다. 행복이란 맛있는 거 먹고,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많이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소소한 행복도 삶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만 약속한 행복을 가져다 준다. 우리가 흔히 소확행(사소한 것에 확실한 행복)을 이야기 한다. 이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행복이 그가 누리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큰 행복에 빠져 있다가 작은 행복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은 행복을 연료로 큰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소소하고 작은 행복이 그의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잘한 행복이 전부인 줄 알면 하루키에게 속은 것이다. 소확행이 전부인 젊은이는 자기의 포부나 꿈이 없이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먹으며 얻는 심리적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3. 예민하여야 한다. 문제 해결 방식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유'들 끼리 연결 시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창조는 연결이라 했지만, 아무 거나 연결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 있는 '유'들끼리 연결되어야 한다. 창의력의 핵심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개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것이 나오고, 그것 때문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된다. 변화가 야기 되는 것이다. 변화가 중요하다. 문화는 그 선회(旋回)하는 변화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를 야기하려면 정답이 아니라 우선 삶 속에서 어떤 불편함(문제)을 느껴야 한다.
4. 우리 사회는 온통 예능에 빠져 있다. 중요한 것은 예능에만 빠진다는 것이다. 예능과 대척 점에 있는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생각하며 즐겨야 쾌락이 온다. 반면 예능은 생각하지 않으며 즐겨야 쾌락이 온다. 깊은 생각을 하며 예능을 보면 재미가 없다. 예능을 즐기는 이유는 생각하는 수고를 하기 싫어서 이다. 생각하는 데는 힘이 든다. 누군가 예능에만 빠진다면, 그는 분명히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수고를 많이 하다 보면,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예능은 그럴 때 즐겨도 충분하다. 큰 폭과 높은 높이가 없이 소확행에만 빠지면 사람이 작아져 버리듯이, 예술 없이 예능에만 빠져도 사람은 쉽게 작아진다.
5. 운동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하여야 한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아야 세계로 향한다. 어떤 일이 힘들다고 하지 않으면, 삶이 1인치도 성장하지 못한다. 만약 한정된 시간에 공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운동을 할 것인가 선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운동을 하라고 권한다. 운동이 자기 통제력을 잘 키워준다. 지적 습관이 어는 정도 된 사람이라면 공부하고 남는 시간에 운동하는 것보다, 운동하고 남는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삶의 완성도를 높인다. 공부는 제3자의 생각이나 지식과 만나는 일로 시작한다면, 운동은 오로지 자기를 만나는 일이다. 운동은 지식을 증가 시켜주지는 않지만, 지력을 키워준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다루고 생각하는 능력인 지력이다. 네가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된다.
이젠 시를 한 편 공유하고, 고미숙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의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오늘 아침 시는 오늘의 글과 통하는 시이다.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의 덧붙임을 우선 읽는다. "TV는 생겨났을 때부터 '바보 상자'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러나 TV는 이제 초창기만 한 영향력이 없다. 국민을 깡통으로 만들 만큼 힘이 세지 않다. 다만 정권의 눈치를 본다는 점에서 TV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 공영 방송은 모든 계층의 의견을 공정하게 보도하지 않는다. 행간을 읽을 줄 아는 눈이 없다면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는 빈 깡통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깡통은 자신이 깡통인지도 모른 채 허공으로 날아간다." 30년 전 시라는데, 지금도 유효하다. 책보다 TV나 SNS에 매달리는 것은, 오늘 아침 사진처럼, 축적되지 않고, 어느 순간 더 허물어진다. 오늘 아침 시처럼, "깡통"이 된다.
깡통 / 곽재구
아이슬랜드에 가면
일주일에 한 번
TV가 나오지 않는 날 있단다
매주 목요일에는
국민들이 독서와 음악과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국영 TV가 앞장을 서
세심한 문화 정책을 편단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앉은
우리나라 TV에는
이제 갓 열여덟 소녀 가수가
선정적 율동으로 오늘밤을 노래하는데
스포츠 강국 선발 중진국 포스트모더니즘
끝없이 황홀하게 이어지는데
재벌 2세와 유학 나온 패션 디자이너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말 연속극에 넋 팔고 있으면
아아 언젠가 우리는
깡통이 될지도 몰라
함부로 짓밟히고 발길에 채여도
아무 말 못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주민증 번호와 제조 일자가 나란히 적힌
찌그러진 깡통이 될지도 몰라
살아야 할 시간들 아직 멀리 남았는데
밤하늘 별들 아름답게 빛나는데
사람은 '살다, 삶, 사랑'과 같은 어원이라고 한다. 즐거운 시간, 아름다운 공간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 없는 시, 공간은 균형이 깨진 '진짜' 삼각형이 아니다. 사람 혼자서는 틈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일상은 튼실하되, 시선은 고귀하게, 현실은 명료하되, 비전은 거룩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이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길이다.
그리고 서는 순간 우리는 걷기 시작한다. 서면 걷는다. 그래 직립과 보행은 동의어이다. 고로 삶은 걷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삶이란 내가 오늘 내딛는 수많은 걸음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걸음 씩 걸을 때마다 온 우주가 출렁인다. 그 걸음을 통해 온 우주가 나를 살리는 데 기여하지만, 동시에 나의 걸음이 온 우주를 출렁이게 한다. 우리는 이 걸음 속에서 울림과 떨림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설 수 없듯이, 사물은 어느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우리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동성이 교감의 원천이다. 어릴 수록 더 잘 교감하는데, 어른이 되면, 교감이 아닌 분별, 공감이 아니 대립이 우세해 진다. 그래 동 서양의 현자들은 우리들에게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글쓰기의 원리도 그런 것 같다. 사물을 '처음처럼' 만나고, 매 순간 차이를 발명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의 동력이다. 이건 인류가 처음 천지 '사이에' 섰던 태초의 신비로 돌아가는 길이고, 갓난 아기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한다.
"생각을 생각하다."(고미숙) 생각도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생각이 형성되려면 일단 두 발로 서야 한다. 직립하면서, 인간의 두뇌 용량이 커졌다. 대신 골반은 수축된다. 그래 동물들과 달리, 여성의 임신기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육아기간도 늘어났다. 임신, 출산, 육아의 전과정이 고단해 진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두 발로 서고자 했을까? 아마도 생각을 하고 싶어, 두뇌를 확장하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두뇌는 걷고 움직이고 사냥하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등등 하는 운동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 활동들과 함께 뉴런이 증식, 연접한다. 뉴런 자체가 연결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곧 연결인 것이다. 하늘과 땅, 이곳과 저곳, 오늘과 어제 그리고 내일을 연결하면서, 생각이 계속 증식된다. 그래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의 크기가 곧 존재의 크기가 되는 이치가 생긴다. 왜냐하면 운동이 생각을 만들어 내고, 다시 생각이 활동의 범위를 증식하는 방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걸 '사유의 탄생과 증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생각이 구체적 현장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제는 거기에 추상의 경지를 더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은 질주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문명, 역사, 세계가 창조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아가 무한 팽창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말하는 자의식도 이때 생기는 것이다.
결국 문명이란 생각의 무한 질주, 무한 증식의 결과물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소유와 증식과 팽창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때 생각의 방향이 선회한다. 생각이 자신의 내면을 향하기 시작한다. 이때 우리는 생각에 생각을 더하다가 생각 자체로부터 탈주하기 시작 한다. 나는 이걸 '생각의 건너 가기'라 말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 일단 멈추어야 한다. 그래야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멈춤과 바꿈과 비움은 동시적이다. 이때 선회(旋回)가 일어난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힘을 멈추는 것이다. 멈추는 것이 쉽지 않다. 멈추는 것 이야말로 최고의 능동성이라는 역설을 체험하는 일이다.
소유와 쾌락, 명예와 권력들은 존재의 외연을 확장해줄 뿐 내부를 충전해 주지는 못한다. 욕망 자체는 죄가 없다. 그것은 생명의 토대이자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이 향하는 방향과 속도가 문제이다. 우리를 살리는 욕망인가? 아니면 우리를 죽이는 욕망인가? 생명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때, 욕망의 속도는 과속한다. 그리고 그 과속으로 달리는 순간 방향이 어긋난다. 멈추라는 이야기는 이 어긋남을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이 알아차림의 반대가 무지, 아니 무식이다. 무지와 무식은 폭력이고 반생명이다.
앎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세계를 향해 무한히 뻗어 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부를 향해 깊이 침잠 하는 것이다. 전자가 증식이라면, 후자는 비움이다. 그렇지만 궁극에 도달하면, 둘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다. 앎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 반대인 무지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 예를 들어, 세계의 이치를 알지 못하면 늘 길을 잃고 헤맨다. 동시에 마음의 구조를 알지 못하면, 늘 충동과 망상에 휘둘린다. 그때 뇌는 삶의 지도가 아닌, 번뇌의 원천이 된다. 그러니까 생을 잘 보존하려면 무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물결치는 대로 함께 흘러가는 것이 생명을 보위하는 법칙이다. 양생, 생명을 살리려면, 자연의 이치, 즉 천성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갓난 아기처럼 호흡하는 것, 사물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등이다. 이를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는 도(道), 양생 술'이라 한다. 그 도를 터득하려면, 무지로 부터 깨어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길, 흉을 알고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자연의 속도와 리듬을 알아야 한다. 그 앎이 생명의 힘이다.
고미숙은 일상에서 그걸 실천하려면, 세계의 근원과 존재의 심연에 대해서 "간절히 궁금해지는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도 말했다. "마음을 텅 비운 채, 우주적 가능성'으로!" 배움의 시작이 질문인 것과 같은 말이다. 천지 '사이의'의 인간이 건너가야 할 길이다. (1) 양생을 위해 몸과 우주의 이치에 대해 간절히 궁금해 한다. (2) 구도자로 삶과 죽음 원리에 대해 간절히 궁금해 한다. (3) 밥벌이를 위해 돈과 활동과 관계에 간절히 궁금해 한다.
인문운동가의 행위는 욕망하고, 해명하고, 해방되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인문운동가는 자신을 알고자 애쓰고 행동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이 삶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행동한 후에, 다시 이런 질문을 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은 그냥 즐기는 것이다. 그냥 그런 질문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이 먹으면서 해소된다. 다만 나 자신의 삶을 더 숙고하는 질문들을 유도할 뿐이다. 이런 질문들은 길들이기 어려운 새와 같다. 붙잡으려고 하면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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