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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에로스의 충동과 로고스의 비전의 결합 (2)

248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9월 27일)

어제 못다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어제 말했던 에로스의 충동이 카오스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그래 이 카오스를 향해 달려갈 때 거기에 리듬과 비전을 부여하는 것을 로고스이다. 에로스의 충동과 로고스의 네트워크의 결합을 위해서는, '에로스의 충동적인 힘에 차서(次序)를 두는 것이다. 여기서 '차서'의 다른 말이 목차인데, 좀 엄밀하게 말하면, 차례(次例)와 질서(秩序)가 합쳐진 말이다. 순서 있게 벌여 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서 돌아오는 기회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개념이다.

로고스는 지성, 지혜,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원동력이 로고스이다. 그래 우리 청춘들은 에로스적인 충동으로 로고스적인 비전을 결합시켜야 한다. 이 로고스를 키우기 위해서 지성이 필요하다. 지성은 새로운 길을 열고자 하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가치를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소유와 집착에서 로고스의 네트워크로 건너가야 한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신체 안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인데, 이 변화를 통해서 우리는 온갖 것을 실험해 봐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소유하지 않아도 사랑이 흘러 넘치게 해야 한다. 사랑은 두 사람의 에로스가 융합되어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내 삶을 선물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존재를 무한 긍정하게 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인 나 자신이 참으로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때부터 자기 인생을 잘 돌보고 자신이 뭔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또한 해야 된다. 이게 로고스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상대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거다. 그리고 그러려고 최선을 다하게 된다. 이런 로고스의 비전을 친구에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 시켜 나가다 보면, 자신의 인생에 대한 비전을 얻게 된다. 그래서 사랑은 가도, 우리는 인생, 생로병사 전체를 살아갈 수 있는 아주 든든한 정신적 기둥을 얻게 되는 거다, 그게 로고스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모두 죽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질문과 해석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죽음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질문을 하면, 그것과 마주하게 된다. 마주하지 않고, 우리가 두려움에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만약 두려운 것이 있다면, 반드시 한 번은 마주해야 한다. 도망가거나 숨거나 덮어서 해결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어떤 비밀도 비밀 자신이 스스로를 폭로하게 되어 있다. "세상은 불공평해도 세월은 공평하다." (주철환 PD)  세상이 이기는 것 같지만, 결국은 세월이 이긴다. 

다시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로 되돌아 오면, 에로스가 충동적이고 카오스적인 힘이라면, 이 힘에 리듬을 부여하고 어떤 방향을 부여하는 지평선이 로고스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지평선은 절대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앞에 있는 거다, 그러니 달려가는 거다. 달려간다는 사실 자체가 지평선의 힘이다.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끝이라는 게 없다. 목적도 없다 그저 하는 거다. 목적이 있다면 삶 자체,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공부이다. 그 공부는 사람을 통해서 하는 거다. 사랑과 우정, 사제간의 교감으로 자신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는 거다. 그 네트워크가 에로스와 로고스가 만나는 삶의 현장이 된다. 이걸 고미숙은 접속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런 접속은 고전을 만나는 방법도 있다. 이런 접속을 하면, 우리 인생이 확장되고 증식된다. 그런 접속이 일어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스토리로 만들 때 글쓰기가 일어나는 거다. 그런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리에 대한 열정'인 로고스를 훈련하려면, 읽고, 쓰고 말하는 거다. 이걸 '지성의 연마'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연마를 통해 얻는 지성의 기쁨을 모르면, 사람들은 화폐를 향해 달려간다. 돈, 돈 돈만 외친다. 화폐로 소비를 하고, 화폐로 사람을 지배하는 쾌감을 누리고 싶어한다. 그 유혹을 끊기가 쉽지않다. 돈이 많으면 상품을 소유하고 사람을 지배하는 쾌감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권력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진정한 기쁨은 없다.

우리는 자신이 누군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한다. 문제는 알면 알수록 모르는 영역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곧 구원이다. 왜냐하면 앎은 무지를 알아차리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위험한 것은 질문이 없고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기는 태도이다. 탐색이나 검색이 아니라, 사색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20세기는 이분법이 지배한 시대이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등으로 이분법이 지배한 세기이다. 그리고 인생은 노동, 화폐, 가족이라는 트라이앵글만 잘 지키면 된다고 여긴 시대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디지털 혁명과 함께 낯설고 기이한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지금은 스마트폰 세상이다. 그 안에 온갖 지식과 정보가 그득하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사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기술과 자본이 혁명을 주도하며, 인공지능의 시대라는 4차산업혁명이 진행중이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만큼 그 기술을 활용하는 인식의 힘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힘이 고양되려면, 생명력인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에로스의 충동에 로고스의 비전을 부과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에서 로고스로 변주되어야 한다. 그 때 좋은 방법이 글쓰기이다. 

그 글쓰기가 욕망의 방향을 바꾸어 주는 이유는 여럿이다. 
▪ 글을 쓰려면 사유가 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면 생각이 명료하고 맑아야 한다. 그래야 언어가 생성되고 논리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명한 언어, 논리적 일관성을 지향하게 되면 욕망의 불꽃은 저절로 사그라진다. 
▪ 글을 쓰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집중을 하려면, 생리 구조가 수승화강(水丞火降)의 상태가 되어야한다. 수승화강은 평정의 다른 이름이다. 
▪ 글쓰기에는 어떤 노동이나 운동보다 고강도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욕망을 잠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방향으로 투여한다는 뜻이다. 
▪ 글이 생산될 때의 성취감은 짜릿한 쾌락과는 클라스가 다르다. 가치를 창조하는 기쁨의 파동은 온 몸을 촉촉히 적셔 준다. 이게 글쓰기가 주는 마력이다.

글쓰기는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낡은 문"에서 배운 것과 같다. 그리고 사진처럼, 스스로 곡을 만들어 연주하는 일과도 같을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지난 와인 강의 중에 성유진 연주자가 25현 가야금으로 자작곡을 연주하는 거다.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외로움을 달래려고 만든 곳이라 했다.


낡은 문이 가르친다/심수향

언제부터인가 문이 삐거덕거린다
삐거덕거리면서 열리지 않는다
왈칵 밀치면 더욱 열리지 않는 문
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에 열린다

시원찮은 문 바꾸라고 하지만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일을
가르치는 문, 세상의 문은 그렇게
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문
때로는 깊은 속내 열어 보이듯
꽃 피는 소리에 가만히 열리는
낡은 문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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