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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감어지수(鑑於止水, 멈춰 있는 물을 거울로 삼다.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7월 5일)

오늘 아침의 화두는 '거울 되기"이다. <장자>의 "덕충부"에 감어지수(鑑於止水, 멈춰 있는 물을 거울로 삼다), 잔잔한 물에 비추어 본다는 말이 있다. 이어지는 말이 "오직 고요한 물만이 제 모습을 비춰보려는 사람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唯止能止衆止, 유지능지중지)"이다. 고요한 물이 거울이 되니, 자신을 늘 고요하게 하라는 말이다. 금년 초부터 나는 습정양졸(習靜養拙)을 실천하고 있다 "고요함을 익히고 고졸함을 기른다"는 말이다.

내가 바쁜 와중에도, <장자>를 함께 읽는 이유는 저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를 뿐, 틀린 인생은 없다는 생각에서, 조금 다른 삶을 꿈꾸기 위해서이다. "물 한 바가지 붓는다고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다. 억지로 바꾸려 든다고 바뀌지 않는다. 본성이 그렇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산속에 들어가 도 닦고 신선 되라는 말이 아니다. 나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상대의 본성을 존중하자는 말이다."(강상구, <그때 장자를 만났다>)

요즈음 읽고 있는 부분이 제5편 "덕충부"의 앞 부분이다. 왕태라는 사람 이야기이다. 왕태는 형벌을 받아 발뒤꿈치가 잘린 불구자이다. 그에게 가면, 수업도 안 하고 토론도 없다는데, 사람들은 비어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온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 느껴지는 가르침(不言之敎, 불언지교)을 받고 온다. 그는 마치 신발의 흙 터는 것처럼 발을 잃은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를 공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감어지수'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들이 흐르는 물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느냐? 잔잔한 물에 비춰본다. 오직 고요한 물만이 제 모습을 비춰보려는 사람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잔잔한 물, 고요한 물은 거울이 된다. 늘 한결같고(常心), 언제나 찾아가면 제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고, 내가 떠나도 잡지 않고, 무엇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준다. 아니 비춰준다. 이런 식으로  왕태가 깨끗한 거울이 되어주었다는 거다. 오늘 아침 나도 세상 사람들에게 '거울 되기'를 다짐해 본다. 쉬운 일은 아니다.

흐르는 물은 상을 이지러뜨린다. 흐르는 물에는 얼굴을 비춰 보기도 힘들다. 게다가 보더라도 흔들리는 내 모습일 뿐이다. 흐르는 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만든다. 반면 잔잔한 물은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의 기준으로 나 자신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래 사람들은 잔잔한 물에 자신을 비추어 보려고 모여든다.

왕태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잔잔하기에, 멈춰 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줄 알기에, 현실을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대신에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발 잃은 것도 신발의 흙 털 듯 여길 수 있었다. 불구를 불구로 여기지 않는 마음, 시련을 시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 기뻐도 기쁨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으로 늘 똑같은 마음을 가졌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상심(常心)이라 한다. 발이 잘린 것 그 자체로는 불행이 아니다.  우리가 그걸  불행으로 여기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상처받는다. 아우렐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의견을 버려라. 그러면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질 것이다. '내가 피해를 입었다'는 느낌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장자는 '잔잔한 물'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비춰본다는 점을 말하면서, 잔잔한 물을 통해 외부를 있는 그대로 비추기를 꿈꾼다. 그 꿈이 지인(至人)이 되는 길이다. 지인이 곧 잔잔한 물, 거울이다. 거울은 그저 벌어지는 광경을 담담히 담아낼 뿐이다. 예를 들어 거울은 뜨거운 불을 그대로 바추기만 할 뿐이다. 거울 속 불이 타오를 리가 없다. 거울은 예쁘고 못생기고 차별하지 않는다. 잘나고 못난 거 따지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에 관심이 없다. 거울은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거울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말리지 않는다.

"지인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다. 비쳐 오는 것이 밉다고 해서 배척하지 않고, 곱다고 해서 환영하지도 않으며, 비쳐진 것이 떠나가도 굳이 그 자취를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울은 모든 사물을 비추며 조금도 몸을 상하지 않는다." 장자의 마지막 내편 "응제왕"에 나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할 줄 아는 '잔잔한 물'이 처음부터 잔잔했던 건 아니다. 잔잔한 물을 유지하려면 잡스러운 것들이 섞이지 않아야 한다. 물은 잡것이 섞이지 않아야 맑지만, 또한 막혀 흐르지 않으면 또한 맑을 수 없다. 거울 같은 마음은 내 마음 다칠까 봐 기뻐도 기뻐하지 않고 슬퍼도 슬퍼하지 않는 감정 단련의 결과 아니다.얼음은 사물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기쁠 때는 함께 환호하고, 슬플 때는 함께 울었던 결과이다.

강상구의 <그 때 장자를 만났다>에서, '감어지수'가 어떻게 '명경지수'가 되고, 왕태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또 다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동시에 '잔잔한 물'로 세상 사는 법을 배웠다. '습정양졸'로 고요함을 유지하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비추어 보려고 모여 든다. 맑은 거울이 되자. 그 길은 다음의 저자 강상구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내 심사 복잡하다고 세상을 등지는 건 장자 식 해법이 아니다. 복잡할수록 세상 속으로 파고들어 그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어울려 살다 보면 나를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는 일들 투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즐겁게 하고 기쁘게 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 그 모든 게 세상이다. 슬프다고 등질 일이 아니라 슬픔에 까지 충실한 게 세상을 사는 법이다. 덜 슬프려 애쓸 필요도 없다. 슬프면 눈물 보이면 그만이다. 그게 세상 사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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