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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경청/정현종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두 주간 쉬었다가, 오늘 다시 <초연결시대, 인간을 말하다> 제 6강을 하는 날이다. 오늘도 또 한번 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는다. 중세(中世, 중간 세상)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대인 르네상스(renaissance)를 맞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해석해야 하는 때에 두 가지 인간의 전형이 나온다. 그 중 한 명이 햄릿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그는 늘 고뇌하며, 행동을 하지 못하는 주저하는 인간으로 배웠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에 나오는 주인공 돈키호테이다. 그는 망상적 생각에 엉뚱하고 무모한한 행동이 앞서는 인간이다.

초연결시대이지만, 정보기술과 생명기술 분야의 두 혁명이 지금껏 인류가 맞다 뜨려 온 최대 과제를 던지고 있다. (1)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을 합친 힘은 조만간 수십억의 사람들을 고용 시장에서 밀어내고 자유와 평등까지 위협할 수 있다. (2) 빅테이터 알고리즘은 모든 권력 소수 엘리트의 수중에 집중되는 디지털 독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럴 경우 대다수 사람들은 착취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지경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무관함이다. 영어 'irrelevance'로 사회에서 관련성을 잃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기술적 도전에 대해, 인문학자는 경고음을 내고 치명적인 잘못을 유발할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설명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에게 여유가 없다. 다가오는 생태학적 위기, 커져가는 대량 살상 무기의 위협, 현상 파괴적인 신기술의 부상이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인공지능과 생명기술이 인간에게 생명을 개조하고 설계할 힘을 건넬 것이다. 문제는 공학자는 인내심이 평균보다 훨씬 낮고, 투자자는 최악이라는 것이다. 시장 권력이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 근대의 시작인 르네상스 시대 고전을 읽는 것부터 시작하고 있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 말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한 게 아니다. 그는 사는 것과 죽은 것 중, "어느 게 더 고귀한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 가운데서 갈팡질팡했던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인간 답게 살 수 있는 지 묻고 있는 것이다.

고전은 변치 않는 근본문제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제공하기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전은 인간의 근본문제에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나은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한 것이다. 그래 오늘도 우리는 아침에 공유하는 시처럼, "경청"하면서, 다양한 양질의 자극을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근본문제는 일거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혈압이나 피부 트러블처럼 평생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할 인생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어제 좋은 와인을 마시고 즐거워함으로써 인생의 허무라는 근본문제를 해결한 것 같아도, 오늘 다시 술이 깨면 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인생의 허무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오늘 또 다시 좋은 와인을 찾는다. 고전에 관한 또 다른 생각은 뒤에 적어본다.

경청/정현종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날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

#인문운동가빅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시하나 #정현종 #와인비스트로뱅샾62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주는 서먹함이 고전의 특징이다. 서먹함(낯이 설거나 친하지 아니하여 어색함)의 반대가 익숙함이다. 생각의 무덤을 우리는 텍스트(Text)라고 부른다. 텍스트의 무덤을 우리는 컨텍스트(context)라고 부른다. 컨텍스트(맥락 또는 문맥)는 어떤 텍스트를 그 일부로 포함하되, 그 일부를 넘어서 있는 상대적으로 넓고 깊은 의미의 공간이다. 죽은 생각이 텍스트에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려면 컨텍스트를 찾아야 한다. 즉 과거에 이미 죽은 생각은 텍스트에 묻혀 있고 그 텍스트의 위상을 알려면 과거의 역사적 조건과 담론의 장이라는 보다 넓은 컨텍스트로 나아가야 한다. 공들여 역사적 컨텍스트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 비로소 고전 속에 죽어 있는 생각들은 서먹하게 온다. 고전이 담고 있는 생각은 현대의 맥락과 사뭇 다른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기에 서먹하고, 그 서먹함이 우리를 타성의 늪으로부터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상상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 서먹함을 즐기기 위해서는 서둘러 고전의 메시지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하지 말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컨텍스트의 경관을 꼼꼼히 감상해야 한다. 컨텍스트가 주는 경관을 주시하며 생각의 무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인간의 근본문제와 고군분투했던 과거의 흔적이 역사적 맥락이라는 매개를 거쳐 서먹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그 순간이 오래전 죽었던 생각이 부활하는 사상사적 모멘트이다. 고전이 만병통치약이 되진 않지만, 고전을 읽다 보면, 우리는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삶과 세계는 하나의 텍스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