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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웃음 세 송이/고진하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느 사찰은 입구에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라 했다.

오늘 아침은 오랜만에 주말농장에 나가 풀을 뽑고, 감자도 캤다. 수확이 별로이다. 그런데 밭 가장자리의 해바라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가 컸다. 고진하 시인의 <웃음 세 송이>가 생각났다. 수확이 적으면 어때? 난 전문 농사꾼이 아닌데… 그동안 흙이 준 기쁨이 큰데… 뭘? 하하!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에 대한 반칠환 시인의 덧붙임도 예쁘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해바라기는 하루 종일 해를 바라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연모하는 자는 연모하는 이를 닮아가는지, 해바라기는 커다랗고 둥근 얼굴 한가득 웃음이 그득하다. 해바라기들은 웃음 중독자들, 비가 와도 웃음을 그치지 않지. 하지만 가장자리 노란 혀 꽃이 웃는 동안 가슴 한복판 통 꽃은 갈색으로 타 들어 간다. 수많은 씨앗들이 엄마의 웃음을 젖줄 삼아 익어간다. 자식들 앞에서는 그냥 웃지만 어머니 웃음 속에는 고독한 무게가 있다. 씨앗들이 다 익으면, 해바라기는 더 이상 해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내 밭의 해바라기이다. 귀티가 난다.

사전적으로 말하면, 귀티는 귀하게 보이는 모습이나 태도를 말한다. 귀티란 귀족같은 이미지를 말한다. 프랑스어로 엘레강스(elegance)한 모습이다. '고급진'이란 말로도 쓰인다. 내가 생각하는 '귀티가 난다'는 말은 외모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그 사람의 성격과 태도 모두가 포함된다. 한 사람의 첫인상보다는 오래 알았을 때 기억되는 인상이다.

귀티가 나는 사람은 자신을 귀하게 여길 뿐만이 아니라, 남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격이 있는 사람, 아니 품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어느 한 유투버는 귀티 나는 사람들의 특징을 이렇게 5가지로 정리했다.
(1) 유행에 민감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유행보다는 자기만의 색깔을 고집한다.
(2) 사람들에게 보이는 체면보다는 자기 소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 자신을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이 자존감이 높아 귀티가 나는 것 같다.
(3) 책임지지 못할 일은 거절한다.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을 하느냐 에 있다. 그래서 때로 'NO'라고 단호하게 이야기 할 줄도 알아야 한다.
(4) 의견을 좁히는 일에 일가견이 있다. 누군가의 편을 들어 주기보다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의견을 조율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갈등이 보인다면 누구의 편을 들어 주기보다는 합의점을 찾아보도록 한다.
(5) 험담과 뒷담화 하는 자리에는 그들이 없다.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말을 할 자신이 없다면 그 자리를 피하는 게 현명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자신의 외모를 바꿀 수 없지만, 그 사람의 품격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오늘 아침도 매 일요일마다 만나는 짧지만 긴 여운의 글들을 공유한다. 인문운동가의 시선에 잡힌 인문정신을 고양시키는 글들이다. 그리고 이런 글들은 책을 한 권 읽은 것과 갖다. 이런 글들은 나태하게 반복되는 깊은 잠에서 우리들을 깨어나도록 자극을 준다. 그리고 내 영혼에 물을 주며, 근육을 키워준다. 한 주간 모은 것들 중 매주 일요일 아침에 몇 가지 공유한다.

웃음 세 송이/고진하

하루치 근심이 무거워
턱을 괴고 있는 사람처럼
꽃 핀 머리가 무거운 해바라기들은
이끼 낀 돌담에 등을 척 기대고 있네
웃음 세 송이!
웃음이 저렇듯 무거운 줄
처음 알았네
오호라,
호탕한 웃음이 무거워

나도 어디 돌담 같은 데 척 기대고 싶네

1. “변화는 절망에 지쳐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타난다.”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글귀이다. (배연국)

그는 “진정한 용기는 터널 끝에 보이는 빛이 어쩌면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헤드라이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아무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희미한 불빛을 찾는 식의 ‘거짓 희망’을 단호히 뿌리치라는 주문이다. 아직 희망이 있다는 안일함이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방해하고 변화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지금 벼랑 끝에 있다는 끔찍한 절망을 받아들일 때 돌아설 용기가 생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어떤 일이든 극에 달해야 반전이 생긴다. 아래로 떨어지는 공도 바닥까지 완전히 닿아야 다시 튀어오를 수 있다.

2. 왜 인간은 뻔한 사실을 간과할까.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에바 메나세는 “사람들이 풍요로움에 빠져 주어진 호사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배연국)

현대의 뇌과학은 그 이유를 이렇게 풀어놓는다. 인간의 뇌는 저장 용량이 제한적이므로 과거의 묵은 기억을 지우거나 외진 곳으로 옮기고, 그 공간을 새로운 기억으로 채운다. 수십 년 전 전쟁이나 가난의 기억보다 현재의 평화와 풍요 문제가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양적으로도 후자에 관한 정보는 넘쳐난다. 인간이 균형감을 잃고 현재의 상황에 쉽게 매몰되는 이유다. 못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격세지감이다.

3. 다닥다닥 붙을 수밖에 없는 구조물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4차산업혁명을 앞세운 ‘디지털 전체주의화’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박세익)

‘포스트 코로나19’가 화두로 떠오르자, 유발 하라리 등 여러 석학들이 국가의 ‘빅브라더 전체주의화’가 더욱 강화되고 앞당겨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CCTV 출연과 개인·위치정보 제공에 ‘동의함’을 누르는, 대체 가능한 자신이 당연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쯤에서 학창 시절 암기만 했던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 국가로부터 개인의 자유로운 생활을 간섭받지 않을 권리.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등에 의해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까지. 이 모든 권리는 당연히 자신의 의무를 다할 때 누릴 수 있고, 국가 안전 보장과 질서 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법률로 제한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핵심까지 국가가 침해할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직장, 아파트 등 소속 집단에서 ‘1호 코로나 환자'로 찍히지 않아야 한다고 노심초사하는 세상이 됐다. 부주의한 사람으로 찍히는 동시에 동선 공개로 사생활까지 ‘탈탈’ 털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 과학 동네는 더 하다. 각 정부 출연연구소마다 지나치다.

4. 교수가 올린 강의자료를 인강(인터넷 강의)에 익숙한 신세대 학생들은 ‘빨리빨리'의 대한민국 답게 2배속 빨리 돌리기로 소화하면서 “코로나 시대 교수의 경쟁력은 목소리"라는 새로운 유행어까지 만들었다. (최병일)

언제부터 인가 대학은 사회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성공동체와는 다른 곳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대와 사회의 문제에 관한 깊은 성찰, 높은 방향을 제시하는 지성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곳이 된 지는 좀 됐다. 정부 프로젝트를 따지 않으면 지속적인 연구 재원 확보가 어렵고, 프로젝트 심사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대학은 정부가 내세우는 양적 지표 충족에 혈안이다. 양적 지표의 핵심은 교수의 논문점수다.

문제는 논문점수가 연구의 깊이 및 탁월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술지에 자신의 논문을 게재하려면 익명의 심사자들의 까다로운 심사와 엄격한 수정으로 몇 년에 걸치는 세월과 싸워야 하는 현실에서 당장의 승진, 궁극적인 정년 보장을 위해 논문점수를 충족해야 하는 교수들은 ‘짧은 시간'에 실릴 수 있는 논문 쓰기를 선택한다. 점수가 높은 하나의 논문에 위험하게 매달리기보다 점수는 낮지만 다수의 논문이라는 비교적 쉬운 길을 ‘합리적'으로 선택하게 된다.

학생 없는 대학은 존재하지 않지만 “강의 안 하고 논문만 쓰면 좋겠다"는 어린 교수들의 볼멘소리는 우선순위가 뒤죽박죽인 대학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투영한다. 디지털 정보 홍수 시대속에서, 코로나-19의 충격은 대학을 위기로 더 급하게 내몰고 있다. 그 위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이던 것이다. 지식만 전달하는 강의는 온라인으로, 인공지능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버린 것이다.

5. 갈수록 부의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는 벌어지고 그럴수록 사회는 갈등에 휩싸이고 불안해진다. 극소수 부자들은 정경유착과 검·언유착 등을 활용, 재산 증식에 목을 맨다. 이른바 중산층은 그나마 확보한 기득권과 재산을 유지하려고 노심초사한다. 대다수 빈곤층은 갈수록 삶이 힘들어져 절망을 느끼며, 그중 일부 착한 이들은 자살 충동에, 매우 공격적인 이들은 무차별 살인 충동에 빠진다. 빈부와 무관, 모든 이가 ‘잘살기 경쟁’ 게임 안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강수돌)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 이게 인생 법칙이다. 어느 사찰은 입구에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라 했다. 그렇다. 코앞의 이해득실에 목숨을 걸고 계급적 이익을 관철하고자 정치·경제, 사회·문화, 교육·종교를 교묘히 조작해봤자, 인생 석양엔 모두 빈손으로 간다. 그러지들 말자. 집값이 계속 오르면 속으로 ‘만세’를 부르지만, 정부 규제로 집값 하락 시에는 망한다고 난리다. 집 한 채도 그렇다. 그런데 여러 채를 지니고 매월 뭉칫돈을 벌던 경우, 위 임차인 보호법에 거품을 문다. 은행의 거액 대출을 끼고 임대업 비즈니스를 하는 이는 계급적 이해관계까지 느낀다. 한편으로는 은행이 이자로 압박하고 다른 편에선 임차인들만 좋아진다는 생각에 초조하다. 보수 기득권, 가진 자들의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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