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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낮은 곳으로/이정하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6월 5일)

연휴가 낀 한가한 주일이다. 그래 오늘 아침은 여유롭게 나만을 위한 아침 시간을 즐긴다. 기다리던 비도 아침에 조금 내렸다. 일기예보로는 오후에 또 한 차례 비가 온다니, 기다려진다. 지금 땅은 매우 메말라 있다. 어제의 더위도 사라졌다. 아침 공기가 좋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나'가 중요하다는 말이 소환되었다.

사실 '나는 누구인가'를 가장 말 해주는 것은 나의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행하는 행동, 혹은 혼자 있을 때 하는 행위이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행하는 작고 사소한 행동들이 내 몸의 리듬을 결정하고, 마음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며, 의식을 특정한 차원과 연결시킨다.

나는 모든 것에 진심 어린 관심을 보인다.  관심이 있어야 질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마음의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림(=무장해제)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 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그게 내가 세상의 만물 그리고 세상 일에 관심을 두는 이유이다.

우리는 날마다 본성 차원에서 타자 또는 타인들과 접촉하며 산다. 우리의 무의식적인 행동에서 그 사람의 본성을 본다. 사람들은 내가 한 말과 내가 한 행동을 잊지만,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 가는 잊지 않는다. 이를 감성(感性) 이라 한다. 마케팅에서는 감성 자극이라 한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가 중요하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 가는 감추거나 숨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그래 생각이 중요하고, 말과 행동도 그 생각을 만들어 주니 또한 중요하다.

신은 우리의 말을 들음으로 써가 아니라 행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를 신뢰한다. 내가 설명하지 않는 것을 내 삶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코람 데오(Coram Deo)'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은 신 앞에 선 단독자인 '너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신 앞에서는 어떤 가면으로도 본연의 모습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코람(Coram)과 데우스(Deus)의 합성어이다. '코람'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라는 의미이고, 영어로는 Before God이다.  반대말이 '인간 앞에서(coram hominigus, 영어로 before men)'이다. 오늘 아침은 우연히 평소 내가 좋아 하는 김기석 목사의 칼럼을 만났다. 즐겁고 읽고, 다른 글을 찾다가, 목사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인간 앞에서"라는 말을 고민하게 되었다.

김기석 목사의 인터뷰에서 만난, "즐거운 불편"이란 말이 오늘 아침에 만난 지혜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 가급적 읽는다. ""꽤 많은 이가 온라인 예배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이야기합니다.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도 말합니다. (중략)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옷을 갖춰 입고 (중략) 그런 번거로운 과정 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끄러매는 일이 아닐까요?" "예배당에 오는 건 시간과 힘을 들이는 일이지만, 그 자체로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가급적 오면 좋겠다는 거예요. 시편을 보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전에 도달했을 때보다 성전을 향해 올라가며 부른 찬양들이 큰 감동이 있어요. 성전에 함께 오르면서 동행들을 만나게 되고, 그 동행들과 함께 자기 경험을 나누는 일들이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가 현장에 나와 예배할 때 그런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에 가급적 예배당에 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 앞에 있는 것도 '토람 데오'마큼 중요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우리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혹은 키르케고르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 같은 말을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공동체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죠.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도 마주쳐야 하고, 나와 다른 사람과도 함께 무언가를 빚어내야 해요. 그러자면 대가를 좀 치러야 하는데요.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버지니아에 머무는데 필라델피아에서 사역하는 이태후 목사가 찾아왔어요. 내가 다른 일정이 있어 1시간 20분밖에 시간을 못 낸다고 했는데도 왔어요. 3시간 거리를 운전해서. 같이 1시간 20분 산책하고 헤어지려는 데 아쉽잖아요? '아니, 이렇게 짧게 밖에 못 보는데 왜 왔어요?' 하니까, 웃으면서 팬데믹이 준 교훈 때문이래요. '기회가 있을 때 만나라.' 좀 감명 깊었어요. 어찌 보면 6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데, 그 낭비가 우정을 만드는 거죠."

그의 말 중에서 어떤 때는 시간 낭비가 우정을 만든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말에 내가 흥분하는 것을 보면, 인문 운동가의 저항 서사를 만들어 내기 때문 같다. 이젠 "욕망의 주류 서사"를 건너가야 할 때이다. 시간은 나는 거이 아니라, 내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이젠 욕망의 배치를 다르게 해야 한다. 욕망의 재배치라는 말은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하자는 거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자는 거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 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목사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본다.

"'H=c/d.' H는 해피니스(Happiness), 행복이에요. c는 캐피탈(capital), 돈이죠. d는 디자이어(desire), 욕망이에요. 자본주의는 행복이 커지려면 돈이 많아져야 한다고 하죠. 그런데 돈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경쟁 논리가 작동할 수밖에 없어요. 경쟁이라는 것은 배타적이지요. 타자가 나에게 지옥을 안겨 줘요. 이 도식 안에서 살아가면 언제나 불안이 내면화됩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가 만든 이 도식 안에 삶을 집어넣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옛날에 비해 돈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그만큼 행복하질 않아요. 욕망이 커져서 그래요. 거꾸로 욕망이 줄어들면 행복이 커지지요. 욕망이 줄어들기 위해서는 내적 든든함이 있어야 해요. 내적 든든함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제법 아름답고 좋다는 걸 알아차릴 때 생겨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보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하죠? 오래 보고 자세히 본다는 것은 시간을 들이는 거예요. 시간의 향기가 그 속에서 배어드는 거죠. 그럴 때 무언가에 대해 경탄할 수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죠. 그때는 욕망이 나를 지배하거나 불안하게 만들지 못해요. 기독교 신앙이란 욕망이 허상임을 알아차리고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죠. '이 정도는 누려야지'라며 욕망을 슬글슬금 키우죠. 거기에 사로잡히면 늘 결핍되어 있고 행복은 영원히 유보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이 낙타에게 물었다. "오르막이 좋으냐, 내리막이 좋으냐?" 낙타가 대답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짐이다." 저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에게 짐이 없다면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울까? 인생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할 때가 많다. 마음의 짐이 무거우면 인생 길이 힘들다. 살아가는 일이 자꾸 짐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욕망을 가볍게 하는게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 개개인에겐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있다. 지나친 욕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오버해서도 안되지만, 감당해야 하는 무게를 비겁한 방법으로 줄여가도 안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그 욕망의 배치를 잘 해야 원하는 것으로부터 좀 해방될 수 있다. 그때부터 자유가 시작된다. 나는 두렵지 않다. 최근에 이유 없는 어떤 불안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데, 무엇 때문일까? 아마 욕심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다. 더 내려놓고,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그리고 여기서 현재를 웃으며 즐겁게 살자고 또 다짐한다.

원래 오늘 아침 <인문 일기>는, 어제에 이어, 피터 데이비스의 <<전념>> 읽기로 했는데, 아침에 엄지혜의 <<태도의 말들- 사소한 것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는 책을 뒤적이다 삼천포로 빠졌다. 그러다가 김기석 목사의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되고, 반성할 점이 있어 방향을 바꾸었다. 연휴로 한가하니, 길게 적어 본다. 그리고 좀 더 "낮은 곳으로" 가고, 다음 주부터는 성당 미사를 참여하며, 사람들 앞에 서고, 그 공동체 속에서 대가를 치르며 삶의 의미를 찾기로 다짐한다. 그 이유는 김가석 목사의 다음 말들이다.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우리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혹은 키르케고르 식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 같은 말을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공동체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죠. 다시 말해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도 마주쳐야 하고, 나와 다른 사람과도 함께 무언가를 빚어내야 해요. 그러자면 대가를 좀 치러야 하는데요." "예배당에 오는 건 시간과 힘을 들이는 일이지만, 그 자체로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가급적 오면 좋겠다는 거예요. (…) 성전에 함께 오르면서 동행들을 만나게 되고, 그 동행들과 함께 자기 경험을 나누는 일들이 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가 현장에 나와 예배할 때 그런 가능성이 더 커지기 때문에 가급적 예배당에 오면 좋겠다고 말하는 겁니다."

낮은 곳으로/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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