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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6월의 달력/목필균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아침마다 인문운동가로서 사유의 거리를 한 가지 찾아 내 사유의 시선을 높인다. 어젠 이런 문장을 만났다. "메시아는 장님과 귀머거리를 치료하고 죽은 자도 살려 냈지만, 불평하는 사람을 치료했다는 일화는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예컨대, 자신이 채식주의라면서, 다른 사람이 준비한 음식을 불평한다. 그런 경우 자신의 입장이 아무리 숭고한 이상이라도 그 실천을 타인에게 의존하면 안 된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만나는 불평꾼의 특징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면 지난번 장소가 훨씬 낫다고 말한다고 한다. 여행하다 보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불편함에 흔들리면서도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여행이라고 말하는 류시화 시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불평은 전염성이 있어, 주변 사람들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 세상에 대한 불평이 나날이 늘어날 때 혹시 기쁨의 근원이 내 안에서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봐야 한다. 톱니바퀴가 닳아 제대로 정오를 가리키지 못하는 시계처럼, 삶에 대한 신뢰와 열정이 멈춘 것이 아닌가도 의심해 봐야 한다. 기쁨의 샘이 말라 갈 때 내가 가는 길들은 불만과 실망으로 가득 찬다. 나도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가난해도 행복한 사람은 자연스럽고 평화롭다. 왜? 세상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게 된다. 애정은 내 마음에서 나온다. 그 내 마음으로 내 영혼을 돌보면 된다. 예컨대, 우리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하고, 그 일의 근원을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자발성의 문제이다. 자아의 중심에서, 남이 말하는 것을 무시하고, 어떤 일을 행할 때 감정과 감수성의 꽃이 피어난다. 마치 새가 하늘을 만나면 기쁨의 원천과 하나가 되듯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의 샘을 막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라. 완벽한 곳은 없다. 또한 아무리 부정하거나 외면하려 해도 아름다운 것을 한 가지라도 발견할 수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사람 있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게 된다. 60억의 사람이 있으면 60억 개의 세상이 있게 된다."(앞의 책)

어제 아침에는, 최근 핫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랬더니 반응이 제각각 이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영화가 좀 우울하고 충격적이고 어둡고 해서 잔상이 많이 남는 것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이런 댓글을 받았다.

어제 못한 영화에 대한 내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다. 이 영화에는 선, 계단, 냄새라는 계급 장벽을 상징하는 세 가지 좋은 설정이 있었다. 현실에선 계층 간 건널 수 없는 선이 짙게 그어져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접점이 없는 두 계층이 만나 삐걱거릴 경우 벌어질 수 있는 균열과 파열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 흐름을 감독은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나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은 불쾌해 영화를 보다가 나왔다는 분도 있었다. 어떤 이는 "피 흘리고 놀라지 않는 마음 편한 영화를 좋아하는 자기에게는 좀 불편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영화를 보지도 않고, "뭐 그렇고 그런 거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평소에는 모르다가 어떤 한 사건이 터졌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양 극단에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족의 만남을 통해 감독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환기 시킨다. 이 영화는 우리 사회에 버젓이 존재함에도,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감독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치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감독은 서로 다른 두 가족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감독은 단지 관찰자인 동시에 전달자일 뿐이다. 감독은 우리에게 각기 다른 해석을 이끌어 낼 뿐이다.

한 가족은 불이 켜지면 흩어지는 바퀴벌레처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우리 사회에는 분명 존재하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의도한 게 아니라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어쩌다 보니 자꾸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난은 반지하 특유의 절대 지워지지 않는 꿉꿉한 냄새처럼 뼛속까지 들러붙어 숨을 내쉴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악취를 품어낸다.

그리고 자신들이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한 가족은 교양과 단정함으로도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지 못한다. 그 가족의 박사장이 하는 이 말을 잘 분석해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가정부를 두고, 일도 잘하지만 무엇보다 선을 지킬 줄 아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선이 무엇인가?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것, 제 분수를 아는 것.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정작 대놓고 선을 넘어오는 한 가족의 사기극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

최진석 교수는 철학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이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길어진 아침이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조직, 국가가 지닌 시선의 높이는 삶의 높이를 결정한다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시선의 높이는 다른 말로 생각의 높이라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훈련을 통해 높아진다 것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는 그 사람의 철학 수준이 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꽃 길만 걷던 사람들은 이 세 가지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기생충> 영화를 폄하한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을 불평하며, 아름다운 초여름의 6월도 접힌 것으로 본다. 그냥 오늘도 하루일 뿐이다. 잘 존재하려면, 하루하루 일상을 잘 이끌어 가면 된다.

6월의 달력/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
헤어짐의 길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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