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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

236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5월 27일)
오늘은 '부처님오신 날'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들은 '사월초파일'로 기억한다. 석가모니(=싯다르타, 고마타 붓다)의 석가는 부처님 당시 인도의 특정 부족 이름이지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고, '석가탄신일'보다는 '부처님오신날'로 바꾸자는 불교계의 주장에 따라 2018년부터 '부처님오신날'로 공식명칭을 변경했다. 올해부터 '부처님오신날'과 '성탄절'이 대체공휴일로 적용된다. 이 제도는 매년 일정 수준 이상의 공휴일을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2014년부터 시작되었다. 시행초기에는 설, 추석 연휴와 어린이날이 다른 공휴일과 겹칠 경우에만 적용됐다. 대체공휴일이 적용되지 않는 날은 신정인 1월 1일과 현충일일인 6월 6일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언론은 '부처님오신날'의 의미와 이것이 내 삶과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묻고 답하는 것보다. 온통 대체공휴일이라는 것과 이 연휴기간에 비가 온다는 기사들이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의 봉축표어가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이다. 개개인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면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 세상이며, 모든 이가 치유와 안정을 통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고 궁극의 평화인 부처님 세상을 이루어 가자는 의미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들의 마음에 치유와 위안을 통해 마음의 평화가 함께 하였으면 한다. 천주교 정순택 서울대주교 메시지처럼, "부처님의 자비와 사랑이 모든 소외된 이웃에게도 물길길 기원하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으로 상생하고 소통하며 함께 하나가 되는 세상"으로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부처는 BC 624년 4월 8일(음력) 북인도 카필라 왕국(지금의 네팔 지역)의 왕자로 태어났다. 부처님 '탄생게(誕生偈)'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였다. 이 말은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가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 뜻이다. '자신의 존귀함을 알라'는 말이 다시 와 닿는다. 우리는 매 순간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좋아하고 싫어함이 즐거움과 괴로움의 원인이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근본 원인은 우리들 밖에 있는 대상이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에 있으니 직접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좋아하는 마음을 늘려가라는 것이다. 그 길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함은 욕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욕심을 버리려면 나를 버리고, 내 재산, 내 재능, 내 몸, 내 마음을 필요한 곳에 나누어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나눔만이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우리 중생들의 즐거움을 얻는 방법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우리는, 연등을 밝히며 내 안의 등불과 진리의 등불을 밝히고, 붓다 가르침의 핵심인 지혜와 자비, 다르게 말하면, 깨달음과 사랑의 실천을 다짐한다. 무엇을 깨달어야 하는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집착이 일으키는 고통("일체개고, 一切皆苦")을 벗어나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른다는 진리, 사성제(四聖諦)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 자비, 즉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를 크게 요약하면, 깨달음과 사랑, 다르게 말하면, 깨달어 지혜를 얻고(사실 가치), 자비를 베푸는(판단 가치) 것이다.
 
'깨닫는다'는 지혜는 나 자신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거다. 우리는 생로병사(生老病死), 몸이 병들거나 늙거나 죽음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무용지물이다. 결국 생로병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해탈, 열반적정이다. 우리는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니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해 건강을 회복하고, 나이 먹어 불편해지면 감수하며 적응해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면 전혀 마음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으니 새로운 몸을 구하고자 한다. 이것이 윤회(輪廻), 환생(還生)이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구할 필요 없어야 열반에 이르고, 다시 원하지 않으니 '생사해탈'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잘 보면,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은 다르지만 그 느낌을 아는 주인인 나는 동일하다. 그러니 마음의 주인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싫어함과 좋아함을 구별해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게 깨달음이고, 우리가 말하는 부처님의 지혜이다. 사실판단이다. 이런 식으로, 언제 어디서나 어떤 조건이든지 변하지 않는 나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는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고, 그 방법은 공덕(功德, 사랑과 나눔)과 지혜(깨달음)를 통해 본래 누구나 가장 완전하고 영원한 즐거움인 해탈 열반을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본다. 내 마음과 내 몸을 나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이다. 그래 절 근처는 모두 등을 단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란 뜻이다. 원래는 등(燈)이 아니라 섬(島)이었다고 한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였는데, 한역하면서 섬이 등불로 바뀐 것이라 한다. 이것이 불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다른 종교와의 차이이다. '나는 세상을 구제하는 자이므로 나를 등불로 삼고 의지하라. 그렇지 않다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다.'
 
불교는 우리 안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우치라' 말한다. 여기서 불성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마음이다. 또는 성품, 심성, 자성, 정신세계라 할 수 있다. "법등명"보다 "자등명"을 먼저 말씀하신 것은 내가 아닌 바깥 세상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에 의지하는 게 부처님 말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인간 존재의 무한한 능력을 그 분은 간파하신 것이다.
 
예수도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진리가 무엇이냐? 묻지 말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셨다. 비슷한 말이 아닌가? 반면 붓다는 어떤 말이 진리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승되어 온 것이라고 해서, 어느 권위자가 말했다고 해서, 세간에 널리 인식되어 있다고 해서 진리로 승인하지 마십시오. 깊이 사유하고 그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여 자유롭고 평온한 삶을 성취하면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십시오, 나의 말도 무조건 믿지 마십시오," 예수의 "진리가 너희를 편안하게 할 것"이라는 말도 이치에 맞게 살면, 편안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부처(붓다)는 영적 삶의 원형이고, 담마(진리)와 립바다(열반)의 화신이다. 어제가 그분이 태어나신 날이었다. 불가(佛家)에서는 연등행사를 한다. 연등을 닮은 꽃인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에,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진흙) 속에서 물들지 않는 깨달음의 연꽃을 피우라는 것이다. 연등을 밝히고, 내 안의 등불과 진리의 등불을 밝히고, 붓다 가르침의 핵심인 지혜와 자비, 깨달음과 사랑의 실천을 다짐한다.
 
"차라리 혼자서 가라/ 어리석은 자와의 동행을 꿈꾸지 말라. 죄업을 벗고 집착을 떠나 숲 속의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법구경>>) 오늘 아침도 시 대신 <<숫타니파타>> 구절 일부를 공유한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과 집착, 번민과 애착
그 모든 것을 집어 던지고
해탈의 진리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탐욕과 혐오와 헤매 임을 버리고
매듭을 끊어
목숨을 잃어도 두려워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말며,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말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려 가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이 되라'고 읽는다. 그러면서 불교를 공부하며 적어 두었던 사유들을 좀 공유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칠불통계(七佛通戒)를 다시 소환한다. “악한 짓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두루 행해서 그 마음을 맑히라.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매순간 마음을 맑히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못배워서가 아니라 잘못 배워서란다. 사람이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버젓이 행하는 것도 많이 배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못 배워서란다. 역대 일곱 부처님들이 깨닫고 실천한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마음을 청정하게 가꾸라"이다. 이를 우리는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선을 말하기 전에 악을 짓지 말라'는 말을 먼저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선행을 많이 하지 못해서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혼란스러운 것은 개인과 집단이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논어>>의 구절이 생각난다. 그리고 '칠불통계'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와 도림 사이의 일화도 전해진다. 백거이가 도림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라고 묻자 도림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백거이가 세 살짜리 아이도 알겠다고 말하자, 도림은 '세 살짜리 아이도 말은 할 수 있으나, 팔십이 된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칠불통계'의 말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에게 폭력을 부리거나 억압하지 않으며, 다른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아가 청정한 내 마음을 더럽히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부정고백'이라고 한다. "...을 하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블로그로 옮긴다.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온갖 집착에서, 작은 명예에서, 사소한 이해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텅 비울 때 모든 것이 비로소 하나가 되며, 자기를 텅 비울 때 그 어떤 것에도 대립되지 않는 자유로운 자기 자신이 드러난다. 이를 불교적인 표현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즉 '텅 비울 때 오묘한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모든 고난으로부터 해탈된 자기, 모순과 갈등을 벗어 버린 자기, 개체인 자기로부터 전체인 자기로의 변신이 있다.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 온전한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자기로부터 시작해 타인과 세상에 도달하여야 한다. 개체에서 전체로의 변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질적인 변화이다.
 
부처님 오신날이 오면, 내 대학 시절에 나를 말'게 만들어준 법정 스님이 생각난다. 스님의 '빠삐용 의자'를 기억한다. “너는 인생을 낭비한 죄다.” (<빠삐용>)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을 무가치한 일에 낭비한 죄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을 무가치한 일에 소비해 버리면 그 생이 녹슬 뿐 아니라 어딘 가에 갇혀 버린다. 그리고 스님으로 배운 것이다. 삶의 기본적인 진리는 남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현대인의 삶은 남을 희생시켜 가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지니면서 스스로 정화하는 자정 능력을 함께 갖고 있다. 그런데 기술문명이 이 질서와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 기술 문명의 문제점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집약된다. 그리고 정보기술의 발전은 전통적인 세계관을 허물고 문화의 혼란을 가져왔다. 돈과 권력, 육체적 향락과 경제적 부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는 바로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양수기를 사용하면 편리하다는 것을 난들 모르겠소. 그러나 한번 기계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 그 기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기계가 있으면 그에 따라 기계의 일(고장, 사고)이 있고, 또 기계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의 마음(機心)이 있게 마련이오. 기계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면 순박함을 잃게 되오. 순박하지 못하면 정신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오. 불안정하면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지킬 수 없소. 그래서 나는 기계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스스로 그것을 쓰지 않소.” (<<장자>> 외편 ‘천지’)
 
신이 준 고마운 선물인 손을 쓰지 않고 머리와 기계로만 사는 우리에게 보내는 엄숙한 경종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을 더 이상 손으로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손은 신이 우리에게 준 귀중한 선물이다. 기계에 대한 열광이 지속되면 결국 우리는 무능력하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그 생명의 손을 잊어버리게 된 것을 스스로 저주할 날이 올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쉰 살의 나이를 ‘바나프라스타’라고 불러왔다. ‘산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라는 뜻이다. 나이 쉰이 되면, 세속적인 의무를 다했으니 이제는 자기 몫의 삶을 위해 마음을 닦으라는 가르침이다. 좀 뒤로 물러나서, 살고 싶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무엇인가에 집중하면서 살고 싶다. 그것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으로 산다면 과거도 미래도 없다. 집중력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고, "마음의 평화, 부처님 세상"일 것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