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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눈뜬장님/오탁번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인문 일기>의 글이 무거워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좀 가볍게 세계일보 배연국 논설위원의 블로그에서 만난 이야기를 공유한다. 배 위원도 최인호의 <산중일기>에서 읽은 것이라 했다."

미국 LA에 살고 있는 청년이 학비를 벌기 위해 여행 가이드를 했다. 어느 날 그는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된 단체 여행객들의 안내를 맡게 되었다.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여행단장이 말했다. “절대로 우리를 장님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보통사람들에게 하듯이 안내해 주십시오.” 이윽고 버스가 출발했다. 청년은 여행객들에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평소처럼 안내하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보이는 저 푸른 바다는 태평양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저 산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할리우드입니다. 언덕위에 쓰인 영어 간판이 보이시죠? 할리우드, 그렇습니다. 저곳은 저 유명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영화의 본고장입니다.” 시각장애인들은 청년의 안내에 따라 차창의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끄덕였다. 자기들끼리 손가락질을 하면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청년은 시각장애인들이 일부러 장님 흉내를 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은 분명히 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일주일의 여행기간이 끝나자 시각장애인들은 청년에게 다가와 악수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덕분에 정말 좋은 관광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올림포스 산 도사, 장님 테이레시아스 이야기"가 생각난다. 테이레시아스가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 있는 한 쌍의 뱀을 본다. 물론이 장님이 되기 전이다. 그런데 테이레시아스는 이걸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지팡이로 둘을 떼 놓았다. 그 순간 테이레시아스는 여성이 되어버린다. 그는 여성인 채로 7년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한 쌍의 뱀을 또 본다. 여성인 테이레시아스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또 지팡이로 둘을 갈라놓는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남성으로 되돌아온다. 양성을 다 경험한다.

테이레시아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도사이다. 그는 육안을 잃은 장님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눈, 심안(心眼)을 얻은 것이다. 그가 예언 능력의 스토리를 이루는 것은 3번 나온다. 첫 번째가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으로 그 아들 오이디푸스를 지목한 경우, 둘째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저 자신을 알게 되면,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고 예언한 경우, 세 번째는 이승을 떠난 뒤에 저승으로 찾아간 오디세우스의 미래를 예언해준다.

그가 눈이 멀게 되고, 이런 심안, 마음의 눈을 얻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올림포스 산에서 어느 날 제우스는, 사랑에 빠지면 남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여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하는 문제를 놓고 아내 헤라와 가벼운 입씨름을 한다. “사랑으로 득을 보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거요. 여자 쪽에서 보는 재미가 나을 테니까.” 제우스의 주장에, 헤라는 여자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남자가 더 좋아한다고 우겼다. 제우스는 여자가 되어 본 적이 없고, 헤라는 남자가 되어 본 적 없으니 당연하다. 그 때 “그럼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어보자”라고 하였다. 그 때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남자는 사랑하되 그 마음으로 기다렸던 기쁨의 열 몫 중 하나밖에는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미 마음의 기쁨이 되니 열 몫을 다 누리는 것이지요.” 즉 사랑에 빠지면, 여자가 아홉 배쯤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는 왜 그런지 솔직히 잘 모른다. 그러자 헤라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테이레시아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제우스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는 한 신이 매긴 죗값을 다른 신이 벗길 수 는 없다. 그래서 제우스는, 보는 능력을 빼앗긴 테이레시아스에게 대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주었다. 다시 말해 육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대신에 심안(마음의 눈)을 얻게 된 것이다. 재미나지 않습니까?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이다. 즉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사물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 한편을 공유한 다음 계속한다. 좀 재미난 시이다. 사진은 아침 산책길에 만난 장미이다. 온 사방이 장미들이다. 새벽에 내린 비에 세수를 한 모습이다. 오늘 아침 사진으로 장미를 선택한 것은 오늘 아침의 화두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생떽쥐뻬리의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는 자기가 시간을 내서 돌보았다는 것과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 때문에 그 장미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장미를 고향 행성에 두고 왔다고 한다. "내 비밀은 이 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어.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아"라고 여우가 말했다. 어린 왕자는 자발성을 상징한다. 어린 왕자는 본능적으로 마음으로 생각한다. 여우에 의하면, 그래야 정말 중요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분석적 접근보다 직관적 의사결정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직관이란 통찰력이라고 본다. 그런 통찰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서 나온다. 선택은 마음으로 하는 편이 좋다. 마음이 가면 선택한다. 너무 따질 필요 없다.

"네 장미를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렸 어. 그러나 너는 잊으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너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너는 네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눈뜬장님/오탁번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 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다시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를 이어간다. 남성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 관한 한, 신들이 아는 수준, 혹은 신들이 말하는 수준 이상의 수준으로 알기까지 이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결혼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런 수준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다.”(<신화의 힘>, p 368). 테이레시아스가 인간의 미래를 훤히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양성인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테이레시아스가 육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대신 심안, 마음의 눈을 얻어 앞일을 헤아리게 된 사연의 또 다른 버전이 있다. 테이레시아스가 숲 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아테나 여신의 알몸을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들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쓰다듬었는데, 그 때부터 테이레시아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신은 장님이 된 테이레시아스가 측은했던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육신의 눈을 잃는 대신 마음의 눈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테나 여신에게 드린 감사의 기도는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감사해야 할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를 느끼게 한다. “영원한 파르테노스(성 처녀)시여. 한 손으로는 치 시되, 한 손으로는 거두시니 감사합니다. 겉 보는 것을 거두어가시고 속 헤아리는 권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신의 눈동자보다 더 큰, 그리고 더 깊은 눈동자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잃고도 얻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보려면,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눈은 물체의 상이 통과하는 렌즈일 뿐이고, 사실 물체를 보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딴 데 있으면 눈으로 대상을 보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배 위원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심부재언 시이불견(心不在焉 視而不見)"이라는 구절을 소개했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를 것이다. 우리가 관심(關心)을 두지 않으면 사물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관심은 어떤 것에 마음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준비 단계이다. 그런데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거기서 한 발 나아가 ‘마음으로 보는’ 관심(觀心)의 단계에 들어서야 한다."(배연국)

배연국 위원의 글은 예를 많이 든다는 것이다. "부처가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고는 제자 아난다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부처께서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쥔 모습을 봅니다.” “무엇으로 보느냐?”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난다야, 눈은 다만 대상을 비출 뿐이고, 보는 것은 마음이니라.” 진짜 세상을 보려면 바깥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것을 또 공유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으로 볼 때이다." 물론 마음으로 보되 중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 이다. 긍정의 마음이냐? 아니면 부정의 마음이냐? 사랑하는 마음이냐? 미워하는 마음이냐? 감사하는 마음이냐? 원망하는 마음이냐?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으로 보아도 껍데기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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