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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뒤처진 새들에게 박수를/라이너 쿤체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28일)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은 벌써 5월 마지막 토요일이다. 계절의 여왕 5월도 다 지나간다. 거리의 장미들도 정점을 찍고 건너가기 시작한다. 거리는 6월 1일 동시 지방선거로 시끄럽다. 우리 동네는 인구가 적어 후보자들이 오지 않는다. 후보자들은 다 '계획'이 있다. 사람 수를 이미 세 본 거다. 난 특별하게 바쁜 일 없이, 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나름 바쁘게 움직이며 해결하고 있다. 그동안 써 온 <인문 일기>를 e-북(전자책)으로 출간해 볼까 한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은 종이책으로 만들어 주는 거다. 그래 많은 이들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생활 속 거리두기'라고 명명한다. '다른' 자신의 삶을 응시해 군더더기가 없는 삶으로 전환하자는 거다. '수동적' 거리두기인 '사회적 거리 두기'와 달리 '생활 속 거리두기'는 개인의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성공한다. 배철현 교수는 이 '생활 속 거리 두기'는 "자신의 언행을 깊이 관찰하는 '자기 응시'가 필수"라고 했다. "인간은 어제의 습관대로 오늘 행동하기 마련이다. '생활 속 거리 두기'란 그런 어제의 삶을 지속하고 연명하려던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보는 행위다. 그런 과거의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천천히 복기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은 언행을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결심이다." (배철현)

지금 우리에게 '거리'라는 말은 강요 받기때문에 부정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적당한 거리는 우리 삶을 더 여유롭게 해주고, 질서를 잡아준다. 프랑스어로 거리는 '디스땅스(distance)'라 한다. 나는 배철현 교수가 내리는 거리 두기에 대한 다음 정의를 전적으로 동의한다. "거리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을 개체로 존재하게 만드는 유일한 장치다. 만일 만물이 '거리두기'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개체가 아니다. 우주 안에서 그런 거리를 용납하지 않은 상태가 '혼돈(chaos)'이며 혼돈이 지배 하는 장소가 '블랙홀'이다." 블랙홀 안에서 만물은 거리두기를 파괴한 채, 무형의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으로서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다. 비록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일지라도 덕당한 거리 두기는 필수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거리두기를 무시하고 상대방의 공간을 무례하게 침입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 질'이며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다.

그 '생활 속 거리두기" 속에서, 나는 나름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가 할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틈나는 대로 <인문 일기>를 쓰는 일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발산이 되고, 그 양만큼 수렴하는 시간이 요구된다, 그만큼 독서와 관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또 그 양만큼 안목과 시선이 높아지고, 세상에 대한 문해력이 늘어난다. 이게 일상의 소소한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또 그만큼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고 마음도 평화로워진다. 더 나아가, 사소한 일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나 만의 임무를 깨닫게 되고, 초조함과 조급함이 사라졌다.

지금 나는  노자 <<도덕경>> 제26장을 읽고 있다. 그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重爲輕根(중위경근) 靜爲躁君(정위조군)" 이 말은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안정된 것은 조급한 것의 머리가 된다'는 뜻이다. 어제도 말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원심력의 속성이 있다. 반면 인간의 본성은 구심력(중력)의 속성이 있다. 욕망은 점점 더 커지고 높아지려 하기 때문이다. 원심력을 타고 자신의 본성을 이탈하려는 욕망을 중심 쪽으로 끌어내리려고 절제하는 태도가 '생활 속 거리두기'이다. 이 말에는 '자기를 소중히 하다'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경솔한 행동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자신의 삶을 가볍게 날리면 안 된다. 자기 규칙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자중'하지 못하면, 중후하고 찰 진 토양을 지키지 못하고 점점 푸석푸석해져 풀풀 표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솔은 바로 '조급(躁急)'과 '초조(焦燥)'를 낳기 때문이다. 조급은 '참을성 없이 매우 급한 거'다. 초조는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함'이다.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뀐다. 미래도 결정에 따라 바뀐다.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 바꾸지 않고 고집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 목표를 잃는 것보다 기준을 잃는 것이 더 큰 위기이다. 인생의 방황은 목표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준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成熟)이다.

우리는, 질문 하는 한, 배우고 성숙된다. 질문은 자기 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내가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탈무드>> 중 "선조들의 어록" 제4장 1절에 나오는 랍비 벤조마의 다음 4 가지 질문을 나 자신에게 해 본다.

질문 (1) 배움과 지혜: "누가 진실로 지혜로운가?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질문 (2) 건강과 권력: "누가 진실로 강한 가? 그는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는 사람이다."
질문 (3) 돈: "누가 진실로 부자인가? 그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분깃(유산중 나의 몫)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질문 (4) 명예: "누가 존경을 받을 만한 가? 그는 모든 인간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1) 배움과 지혜: 사람들은 앎에 대한 욕구가 있다. 학구적인 지식욕은 없더라도 세상사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특히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한다. 선견지명이 있어서 실수와 불운을 피하고 싶어한다. 선견지명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보면 얼마든지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 배우지 못하고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비슷한 실패를 따라 가는 이유는 자신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방법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라 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인생을 보면 충분히 어떻게 살았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배워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이 배움과 지혜이다. 나는 지혜롭고 싶다. 그래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 한다.

(2) 건강과 권력: 건강과 권력은 모두 강함을 의미한다. 누가 건강한가? 더 먹고 싶은 욕망, 달고 짜고 매워 입에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망,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는 사람이다. TV나 스마트폰을 보며 빈둥거리고 싶은 나태한 욕망을 절제하고 움직여 운동하는 사람이다.  누가 권력을 가진 사람인가? 다른 사람을 많이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린다 해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음란이나 부패에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돈: 요즘 특징적인 현상은 부동산으로, 주식으로, 암호화폐로, 방송으로, 사업으로, 주위의 누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백 만원 하는 명품을 새벽부터 줄을 서서 사고 SNS에는 수억 원대 슈퍼 카를 자랑하는 사진이 즐비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은 사회 전체적으로 어느 때보다 더 커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어떠한 물질로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우지는 못한다. 우리는 돈을 더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함으로 부자가 된다.

(4) 명예: 요즘은 인기가 곧 돈이다. 그런데 아무리 인기가 많은 인물이라 해도 추문 하나에 모든 활동을 접어야 하니 명예롭게 인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는, 겸손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인기는 한철 잠시 아름다운 꽃처럼 금세 시든다는 점이다. 명예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존경하는 만큼 이어진다.

나는 지혜롭고 싶다. 그래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려 한다.
나는 강하고 싶다. 그래 나의 욕망을 절제하려 애쓴다.
나는 부자이고 싶다. 그래 나의 몫에 만족하려 한다.
나는 존경받고 싶다. 그래 내 주변의 사람들을 존경하려 한다.

랍비 벤조마의 말을 비틀어 보았다. 나는 위의 네 가지를  늘 명심(銘心)하고 싶다. '명심'이란 잊지 않도록 마음에 깊이 새겨 두는 일이다.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 그 내용을 새기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나를 괴롭히면, 내 심장에 기록된 다음 글 또한 소환할 거다. '물론 나는 없다. 이미 다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나를 괴롭히고 저주하려는 그들이 그런 짓을 못하게 할 능력은 내가 없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힘겹더라도 내적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에픽테토스의  다음 말도 자주 기억할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어떤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 즉 내가 가진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지가 실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비난도 모욕도 가난도 어쩌면 죽음 마저도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 단어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공포의 양이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두려움을 줄이면 된다. 줄이는 방법은 공지영 작가의 글에서 얻었다. 오늘이 전부일 뿐 바라는 것이 적으면 두려움도 적다. 지금-여기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공 작가의 다음과 같은 바람처럼 말이다. "모두들 행복하시라. 바로 오늘! 바로 지금! 한 번 뿐인 당신의 생이 가고 있으니."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할 것이다. 그래 나는 자유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나는 자유다"(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긴 글을 쓰고 나니 힘을 솟는다. 오늘은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의 이름으로 대청호에서 하는 플리마켓에 나간다. 새로운 놀이 같은 일이다.

그렇지만 나의 비축된 힘은 "뒤처진 새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다짐에서 오늘 아침은 라이너 쿤체의 시를 공유한다. 노인이나 장애인, 동물을 대하는 걸 보면 그 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사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기보다 약한 대상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독일 시인 쿤체는 뒤처진 철새를 응원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고. 남들과 발을 맞출 수 없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 건지 안다고 말하는 쿤체는 따뜻한 사람이다. 뒤처진 사람의 심정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인격자다. 지금-여기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만, 뒤처진 새들에게 본는 박수는 잊지 않을 테다.

뒤처진 새들에게 박수를/라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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