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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236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5월 26일)
사람은 '배우는 존재(호모 스투덴스, Homo studens)'이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선 배움이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할 줄 알아야 한다. 할 줄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타고난 '할 줄 앎(양능良能)'과 '알 줄 앎(良知양지)'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바를 배워 감으로써 삶이 꾸려진다. 배움은 이렇게 살아감의 시작이고, 살아감은 배움을 실천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살아감이 자체로 배움이 되는 이유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한 번 배우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편의를 위해서는 배운 바를 수시로 익히는 과정이 수반돼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며, 학(學), 그러니까 배움 만을 기쁨의 원천으로 보지 않고, 익힘, 즉 습(習)을 그에 합쳐 기쁨의 원천으로 제시한 까닭이다. 익힘을 통해 살아감 속에서 배움을 지속하여야 하는 것이다. 살아감이 배움인 이유이다.
 
그 이유는 또 있다. 배움의 주체인 나도 변하고, 내가 속해 있는 세상도 변하며, 학습 대상도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배워야한다. 그리고 나이가 더해가든 사회적 지위가 변하든, 내가 변하면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도 변하니 이미 배운 바라도 다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어쩌면 '진짜' 공부가 아닐까?
 
그런데 우리 사회는 성적을 내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한 나머지, 삶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등한시했다. 다시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 여기서 배움은 한 인격이 사회와 질서 안에서 규칙과 질서를 지키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공부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데는 자격이 필요하다. 진정한 공부는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 어떤 지식도 삶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그러니까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다. 명성과실(名聲過實), 명성은 높으나 실속이 없는 사람이 바로 이들이다. 머지않아 실속 없는 내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공부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자가 지금 우리 사회의 리더들이다.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 오늘 아침은 시를 읽은 후 자유에 대한 공부를 하는 시간이다. 그래 <공부>라는 시와 저 들끼리 멋지게 피고 웃고 있는 내 채소밭을 찍은 사진이다. 꽃들도 큰 머리를 채우고 공부한다.
 
 
공부/유안진
 
풀밭에 떼 지어 핀 꽃다지들
꽃다지는 꽃다지라서 충분하듯이
나도 나라는 까닭만으로 가장 멋지고 싶네
 
시간이 자라 세월이 되는 동안
산수는 자라 미적분이 되고
학교의 수재는 사회의 둔재로 자라고
돼지 저금통은 마이너스 통장으로 자랐네
 
일상은 생활로, 생활도 삶으로 자라더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도 오랜 공부가 필요했네
 
배우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미적분을 몰라도 잘 사는 이들
잘 살아서 뭣에다 쓰게
쓸 데가 없어야 잘 산다는 듯이
꽃다지들 저들끼리 멋지게 피어 웃네
 
 
윤 태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편협한 극우적 이념과 닮았다. 냉전시대의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 자유란 단어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 사람마다 자유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 있겠지만, 대통령이라면 극단적인 이념에 치우치거나 편협한 의미로 자유를 입에 올리면 안 된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이 기준이어야 한다.
 
헌법에 나오는 자유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확고”히 한다거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겠다는 다짐, 그리고 신체의 자유, 거주와 이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 인권을 확인하는 것들이다. 공권력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다음이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윤이 말하는 식의 자유는 헌법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헌법 전문과 제4조에 규정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얼핏 비슷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때 말하는 질서는 전체주의, 권위주의 세력이 말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르다. 헌법이 규정하는 ‘질서’도 권력이 국민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법의 지배’라는 말도, 법률로 국민을 다스린다는 게 아니라, 권력자나 권력 기관을 법의 지배 아래 두겠다는 주권자의 의지의 표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집권 세력은 국민이 정부의 지침을 잘 따르며 질서 정연하게 살길 바라겠지만, 이런 식의 질서는 국민에게 강요할 수 없는 무례이며, 자체로 인권 침해다.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였다. 나는 프랑스 유학하면서 그 사회로부터 이 의식을 배웠다. 프랑스에서는 좌파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폭넓게 동의를 얻고 있다. 이 말은 이렇게 다시 고쳐 말할 수 있다. "사회 정의가 사회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 질서가 사회 정의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교육시겼고 지금도 시키고 있다. '기초 질서를 지키자!"는 구호로 학교에서 교육 받으며, '안보 이념'을 정의나 자유, 평등의 가치보다 더 강조 받았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질서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지금도 계속 주입 받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분단 상황을 이용한 지배 세력에 의해 주입 되어 사회 구성원들한테서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그만큼 강력하게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 자들의 사회 정의의 요구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 받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 정의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없다. 사회 변화를 두려워하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가 수구 보수 세력들에 투표하는 것도 이 두려움의 표시이다.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한다. 사회 정의가 사회 질서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질서에 대한 무의식의 복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다. 우리 인간은 무질서와 혼란은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은연중에 안정 상태, 아니 중지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지배 세력이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의와 차별, 배제가 이루어지고, 억울함과 굴종을 강요 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 정의를 계속 요구하여야 한다.사회 질서보다 사회 정의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고 저항해야 인간이다. 생각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삶은 주인의 삶이 아니다. 존재를 남에게 맡긴 노예의 삶이다. 알베르 까뮈는 "나는 저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저항은 창조이다. 창조는 저항에서 나오고, 그 뿌리는 분노에 있기 때문이다. 내 말이 아니다. <<분노하라>>는 책을 쓴 스테판 에셀이 한 말이다. 불의, 불평등, 전체주의, 비인간화 등에 대한 분노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든다. 분노해야 할 일에 의연히 분노해야 한다. 어리석음을 걷어내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이성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게 인문 정신이다.
 
우리 헌법에 규정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은 국민주권주의 원칙이다. 국민의 능동적 정치 참여, 자유로운 투표, 반대 의견의 자유로운 형성 등을 뜻한다. 곧 대한민국의 헌법 질서는 대통령은 물론 어떤 국가권력이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함부로 제한할 수 없으며, 검찰이나 경찰은 물론 대통령이라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질서를 뜻한다. 헌법이 규정하는 자유도 그렇다. 대통령에게 있어 자유란 어떤 특정한 이념에 치우친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국민이 선출한 일꾼 답게 국가권력을 잘 통제해서, 국민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라는 거다.
 
이를테면 경찰을 통제해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철저하게 보장하고, 특정 사건에 대해 반복적으로 수 백번씩 압수수색을 할 정도로 검찰이 준동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는 꼭 필요한 경우에만 최소한의 범위에서, 다른 대안이 없는 아주 특별한 최후의 경우에 제한적으로 진행하도록 견인하는 데 있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올바른 지적이다. 좀 꼼꼼하게 읽고 우리 사회의 주인인 우리 시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대통령에게 있어 자유란, 국민이 선출한 일꾼답게 국가권력을 잘 통제해서, 국민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라는 거다. 이젠 오 사무국장의 말을 끝으로 직접 들어 본다.
 
"자유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고, 취임 선서의 첫 번째 약속처럼 “헌법을 준수”하기로 모든 국민에게 약속한 사람이 지켜야 할 신성한 책무이기도 하다. 그러니 대통령이 나서 자유를 모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통령에게는 대통령다운 말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물론 대한민국 헌법이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