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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방문객/정현종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오늘 아침은 지난 목요일에 말했던 것처럼, "환대"를 화두로 <인문 일기>를 쓰려 한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다가, 나는, 달에서 본,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래 구글에서 가져온 다음 사진을 공유한다. 이 사진은 1968년 아폴로 8호 우주비행사 윌리엄 앤더스가 달 표면 위로 떠오르는 장면을 찍었던 것이다. 이 사진은 아폴로 8호가 촬영한 가장 유명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우주의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떠 있는 작고 외로운 푸른 구슬에 불과하다. 이 작은 구슬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는 우리들의 안식처이다. 시인 아치보트 매클리시는 당시에 "저 끝 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rider)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썼다 한다.

우리 모두가 지구의 승객이라는 말이 마음에 확 와 닿았다.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 지구라는 작은 행성, 푸르게 빛나는 이 곳과 우리 서로를, 모든 동식물들을, 같은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자 동료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이 지구라는 작을 별을 타고 있는 여행하는 승객이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지구라는 별 기차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먼저 탄 승객들의 엄청난 환대에 의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거다.  특히 부모는 내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될 때까지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다. 충분히 성장하면 인간은 지구에 새로 도착한 승객들을 환대함으로써 자신이 받은 것을 갚는다. 그리고 그들이 떠날 때, 남아 있는 승객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환송한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대하면,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란 좋은 시가 기억난다. 그래 다시 한 번 오늘 아침 공유한다. 오늘 아침 사진은 곧 가지에 밥이 열릴 이팝 나무의 어린 순이다. 우주 속에 서면, 우리 인간은 이것보다 작을 존재이다. 최근에 다른 사람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잘 안 된다. 안 되는 사람은 안 되는대로 남겨두고, 되는 사람이라도 환대를 하자.

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왜 나는 다른 이를 환대하지 못할까? 이 질문을 하다가, 지난 글 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만났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분리 혹은 고립을 통해 우리들을 소외시킨다. 신자유주의 옷을 압은 '야수' 자본주의는 우리를 몸과 장소 그리고 시(詩)로부터 소외시키려고 애를 쓴다.
(1) ICT, AI 등 과학 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살지만, 정작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자본주의의 첨단에서 살아가는 이들일수록 몸의 직접적인 감각 체험으로 부터 멀어진 채 살아간다. 몸을 사용하고, 몸의 감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2) 현대인들은 어떤 장소와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부평초처럼 떠돈다. 마을이 해체되면서 공동체적 삶 또한 무너졌다. 마을은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고이는 장소가 아니다. 심지어 집조차 가족들의 기억의 뿌리가 아니라, 재산 가치로서 기능할 뿐이다.
(3) 풍요의 환상을 따르면서, 현대인들은 산문적인 현실에 충실할 뿐 시적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일상은 성공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기회일 뿐이다. 사람들은 일상 속에 깃든 신적 광휘, 어떤 경이를 보지 못한다. 시적 사고는 현실 부적응자들의 낭만적 퇴행으로 치부되기도 있을 뿐이다.

이런 소외의 결과, 나를 포함한, 우리 현대인들의 삶은 두텁지 못하고 납작해졌고 다른 삶에 대한 상상력은 고갈됐다. 오로지 자본주의가 유혹하고, 주류 세계가 제시하는 길을 묵묵히 따라 달릴 뿐이다. 피로와 권태 그리고 무의미가 사람들을 확고히 사로잡고 있을 뿐이다. 그런다 보니 자기 속의 여백이 사라지면서, 여유를 잃어가면서, 타자를 환대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위축됐다. 그러면서 타인들은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기괴하고 낯선 이들이 우글거리는 장소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유형적 또는 무형적 담을 높이 쌓는다. 문제는 높은 담은 타자 혹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만, 동시에 우리 또한 담 너머의 사람들을 볼 수 없기에 의구심은 더 커진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쉽게 낯선 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거나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위험사회는 이렇게 도래하고 있다. 나부터 성찰하는 아침이다.

우리는 한 배에 탄 승객이다. 소설가 김영하에 의하면, 타인에게 환대를 받으려면, 우선 내가 신뢰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다른 이를 믿어야 한다. 환대는 신뢰와 쌍을 이룬다. 언젠가 최진석 선생의 글을 읽고 적어 두었던 것이 있다. 우리가 나이 먹으면서 '꼰대'가 되는 것은 '잔소리' 때문이다. 그 잔소리는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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