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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 가족』

1497.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4일

 

 

나는 TV 보지 않는다. TV 나를 너무 여러 방면에서 유혹하기 때문이다. 대신 수시로 페이스 SNS 보거나, 노트북으로 뉴스들을 본다. 너무 자주 기웃거려 문제이다. 어젯밤에는 딸이 방으로 달려와 속상하다고 울었다. 생후 16개월 입양아 정인양이 입양 10개월여 만에 짧은 생을 마감하게 사연이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나 보다. 최근 SNS에도 #정인아_미안해라는 해시태그가 퍼지고 있다고 한다.

 

딸에 의하면 아이가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지난해 10 13일이라 한다. 당시 전인양은 췌장이 절단되고 주요 장기가 손상돼 배가 피로 가득 있었다고 한다. 양쪽 팔과 쇄골 다리 등도 골절된 상태였다고 한다. 경찰 조사 결과, 입양한 양부모는 또는 자동차 안에 혼자 두는 유기 방임하고 지난 6월부터는 상습적인 폭행을 가했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어린이 집교사와 진료했던 소아과 의사 등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모두 무혐의 처리되었다고 한다.

 

지난 , 사단법인 희망의 대전 본부는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 가족』이란 책을 "우리 대전 같은 책읽기" 책으로 선택한 있다. 나도 책을 꼼꼼하게 일었었다. 지난 9 14 아침에 썼던 글을 다시 공유한다. 그리고 일동안 다시 고민해 본다. 한국에서 가족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살펴 보겠다. 2 정인양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사회의 아이들과 관련된 지난해의 각종 통계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 가족에 보았다. 좀 공유하고 싶다.

* 2016년 출생아 수는 인구 통계 작성 이래 최저를 기록했다. {어제 뉴스를 보면, 2020 12 31 기준 출생자가 사만자보다 인구가 자연 감소하는 '인구 데드크로스'현상이 현실화되었다고 한다.)

* 같은 기간 동안 302명의 갓난 아기가 길바닥과 베이비박스에 버려졌다.

* 같은 기간 해외로 입양된 아이는 334명, 거의 하루 한 명 꼴로 아이를 버리고 해외로 보낸 셈이다.

* 영유아에 국한하지 않고 18세 미만의 아이들로 시야를 넓혀보면 부모에게 버림받아 시설, 위탁 가정 등으로 간 아이들은 4,503명, 하루 평균 12명 이상이었다.

* 같은 기간 학대를 당해 숨진 아이는 한달 평균 세 명 꼴이었고, 아동학대 판정을 받은 경우는 하루 평균 51건이었다.

* 아동 학대의 80% 이상은 집에서 일어났다.

* 같은 기간 사교육비 지출은 역대 최고를 찍었다.

* 한국 남성이 집에서 자녀와 함께 보낸 시간은 하루 평균 6분에 불과 했다.

* 육아휴직을 한 여성 중 43%는 복직 1년 안에 사표를 냈다.

 

통계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우리 사회는 참 이상하다. 왜 그럴까? 한 마디로 그 이유를 말하기 힘들다. 우선 생각 드는 것은 부모들이 자녀를 소유물로 대하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작은 아이'이다. 그저 작을 뿐 성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어린 생명체이다.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강력히' 요구된다. 모든 아이들은 자율적 인간, 공감하는 시민으로 자라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제도의 개선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위계적 질서를 걷어내고,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타인과 공감하는 태도의 변화, 일상의 민주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책을 공유하다, 언젠가 멈추었다. 처음 부터 다시 정리를 , 다시 공유할 생각이다. 우리 사회의 '이상한' 가족주의 낯을 인문운동가의 입장에 필링(peeling)하고 싶다. 언젠가 적어 두었던 시가 생각난다. 김기택 시인의 다음 시이다. 시를 소개한 채상우 시인의 덧붙임도 공유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엄마'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나 보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행을 읽고 나면 참 안타깝고 애틋하다. 그런데 정말 희한한 일이 하나 있다. 살다가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 ' 하고 불러 보면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가 아니라 젊고 상냥한 엄마가 저쪽에서 다정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나만 그런 지는 모르겠다. 그야 모르겠는데,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터덜터덜 축 늘어진 발걸음으로 집에 오다 보면, () 엄마가 대문 앞에 서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래서 '엄마 ' 하고 입속으로 가만히 부르면 이런 말들이 도란도란 들리는 듯도 하다. '아이구우, 우리 강아지, 오늘은 누구랑 놀았어? 술래만 했어? 무릎 까졌네. 호오 하자. 얼른 씻고 밥 먹자. 그만 울고오'. (채상우 시인)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런 가족인데, 우리 사회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아침 사진 오리 가족들이다. 아침부터 왜가리 손님이 찾아왔다.

 

 

모녀 2/김기택

 

이윽고 그녀는 제 엄마보다도 나이가 많아졌다.

엄마가 나이 먹는 일을 그친 후에도

쉬지 않고 성실하게 나이를 먹어 온 탓이다.

엄마보다 훨씬 늙었는데도

그녀는 자신보다 젊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를 부를 때마다

그녀는 어린 나이로 돌아가서

옛 얼굴 젊은 나이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를 본다.

불러도 목소리가 닿을 자리가 없어서

만질 손과 얼굴이 없어서

엄마는 늘 목소리 속에만 머물러 있다.

자꾸자꾸 불러서 목청 안에만 가득하다.

엄마 부르는 소리가 허공을 헤매도

엄마는 도저히 슬퍼지지 않는 표정이 되어

늘 엄마의 자리에 있다.

그녀의 주름과 흰머리가 나날이 늘어나도

엄마는 딸과 늙지 않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불쑥불쑥 엄마를 불러서

엄마와 딸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서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만 몰라보게 늙어 가고 있다.

 

 

김희경 작가는 4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 우리 사회의 이상한 정상가족을 살핀다.

첫 번째는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살핀다. '내 것인 너'를 위한 친밀한 폭력이라며 행해지는 체벌 문제, 과보호 아니면 방임으로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문제,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이상한 용어 문제, 친권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지적 등의 문제를 말한다. 나는 내 머리에 작은 전구가 켜졌다.

 

두 번째는 가족 바깥,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 가족으로 산다는 것의 문제를 다룬다. 미혼모는 있는데, 왜 미혼부는 없는가? 왜 해외 입양을 하는가?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정말 중요한 질문들을 한다.

 

세 번째는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규정하나를 질문한다. 왜 우리 사회는 '믿을 건 가족 '이라는 신념이 지배할까? 묻는다.

 

네 번째는 대안을 말한다. 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고민한다.

 

그럼 책의 1 이야기를 공유한다. 1부는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자식은 소유물로 보는 가족 안에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1부는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1) ' 것인 ' 위한 친밀한 폭력, 체벌: 학대와 체벌의 거리 문제를 다룬다. 성인 대상 폭력은 NO, 아들은 OK 문제, '사랑의 ' 있는가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2)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사회를 말해준다. 아이는 훈육의 대상이 아닌 인권의 주체이다. 체벌도 학대와 같이 정부가 금지할 있는가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

(3) 과보호 혹은 방임, 자식을 소유물로 대할 생기는 일에 대한 이야기이다.

(4)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말의 모순을 지적한다.

(5) 친권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문제를 이야기 한다.

 

목차에 달린 하나 하나의 언술만 들어도 끔찍하다. 나는 어떤 책을 읽을 목차를 꼼꼼하게 우선 읽는다. 주장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나씩 페이지를 따라가면서, 눈에 뛰는 부분들을 공유한다. 우선 우리는 체벌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부터 시작한다. 누가 되었든 아이를 때리는 있을 없는 폭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성원 절반 가량이 특정 연령층에 대해 특정한 조건하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문제는 폭력이 높은 수위의 폭력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된다는 점이다.

 

아이를 훈육하기 위해 한다는, ' 것인 ' 위한 체벌은 아동 학대로 이어진다.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인 폭력이기 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학대와 체벌의 경계가 애매하다. 평소 체벌을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극도의 양육 스트레스를 겪을 스트레스가 촉매제가 되어 학대로 치닫게 된다. 반면 체벌을 해서는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양육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상황에서도 학대로 치닫는 경우가 적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나 체벌을 금지해야 아동 학대가 준다. 그런 면에서 국가가 체벌을 금지하는 법률을 빨리 만들 필요가 있다.

 

다음 문제는 성인대상 폭력은 되는데, 아이들은 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부모의 훈육적 체벌은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신체의 온전성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상 부모 중심, 성인 중심 해석일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 상황에 따라 부모는 자녀에게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것이 우리 사회는 강할까? 저자는 자녀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래서 일부 그런 부모들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대상으로 간주한다.

 

사실 체벌을 비롯하여 친밀한 관계에 있는 타인에 대한 반복적 폭력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것이다. 다시 의식할 필요가 있다. 나는 언제든 당신을 통제할 있다는 권위주의적 메시지, 당신이 존재할 권리를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인 나라는 주장, 그렇게 함으로 상대를 침묵시키고 상대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때리는 사람의 목소리를 상대 안에 심으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내면화 것이 반복적 폭력을 낳는다.

 

사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사랑의 ' 또는 '어머니의 회초리'라는 말이 미화되고 있다. 이건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있었다" 논리로도 표현된다. 이러면서 심각한 것은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 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면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내가 맞을 짓을 했다' 피해자 탓을 한다. '맞는 것보다 상대를 잃는 두려운'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 한다. 어떻게? '사랑의 ' 이름 속에는 사랑하면 신체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힘으로 억눌러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에서도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해결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아이들에게 "네가 원하는 얻기 위해서 사람을 때려도 괜찮다" 가르친다. 또한 그렇게 해서 맞은 아이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맞았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부정한다. 이런 식으로 소중한 대점을 받지 못하면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다.

 

글이 길어진다. 다음 가지 문제만 이야기 하고, 내일로 미뤄야 겠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을 포함한 폭력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왜냐하면 체벌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힘의 차이를 생생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불평등을 인지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힘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부모 혼자 아이를 키울 없듯이 부모 혼자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아니다. 점이 인문운동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다음과 같은 우리 사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 체벌을 쉽게 생각하고 용인하는 태도
  • 폭력에 관대한 정서
  • 공적 개입의 부재

 

이로 인해 자잘한 구멍이 사방에서 생겨나고, 결국 어디에 선가는 아이가 맞아서 목숨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