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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

1496.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3일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는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는 능력, 공감 능력과 창조적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주부터 나는 일간에 걸쳐서 인공지능의 주인이 되는 나를 만드는 법을 이진성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8가지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여섯 번째,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 주장을 오늘 한다. 참고로 이진성 작가가 말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8 가지이다.

  1. 디지털을 차단하라
  2. 나만의 '평생유치원' 설립하라
  3. 노잉(knowing) 버려라. 비잉(being)하고 두잉(doing) 하라
  4. 생각의 전환, '디자인 씽킹(designe thinking)' 하라.
  5. 인간 고유의 능력을 일깨우는 무기, 철학 하라
  6.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
  7. 문화인류학적 여행을 경험하라
  8. ''에서 '', '우리' 보라

 

7번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6 "바라보고, 나누고, 융합하라"에서 융합 이야기를 번째로 하고 있다. 지난 글들은 12 18일과 12 23일자 아침 글쓰기이다. 오늘은 세번째로 어렵지만, <정희진의 융합> 칼럼들을 읽어가며, 융합 이야기를 마칠 것이다.

 

우선 "융합은 차이를 재해석하고, 재배치하는 "이라는 이야기부터 한다. 우주는 차이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엄격히 말해 만물 중에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분명히 것은 우리가 말하는 차이는 사회가 선택한 차이일 뿐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차이는 모두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몇일 전부터 살펴보고 있는 <정희진의 융합>이라는 칼럼에서, 선생은 "차이는 분업이나 차별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떤 차이는 다양성으로 인식되지만, 어떤 차이는 차별의 '이유' 된다" 말했다. 조심해야 한다.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된다. 그래 인간이 만든 차이를 두고,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해서는 안된다' 말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은 사회적 구성물인 차이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해소, 인정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된다. 정희진 선생으로부터 배운 중요한 인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차이를 재해석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는 모든 사유의 키워드이자 융합의 핵심이다. 융합을 포함해, 모든 개념은 차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융합은 생각하는 ,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는 태도이다. 융합이 서로 다른 것을 결합하는 것은 아니다. 융합은 협력이나 대화가 아니다. 충돌이다.

 

우리는 차이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처리해야 한다. 그렇다고 서로 다른 것을 융합이라는 이름으로 결합하는 것으로는 어렵다. 융합은 사회가 요구하는 크로싱, 앎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요한 태도는 아는 것을 버릴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 력이다. 그래서 융합 작업에서 가장 어려움은 갖가지 위계이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차이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융합은 차이를 재배치하고, 그것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와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 필요하다. 삶은 지속적인 '-노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멀' 특정 시기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인생무상. 삶에는 정상, 노멀한 상태가 없는 법이다. 너무 어렵지만, 분명하게 하는 것이 인문 운동이다.

 

"차이와 차별은 다르다." "다름과 틀림은, 단지 차이일 뿐이다." "동의 하진 않지만, '다르다' 인정한다." 나를 일상에서 감사와 행복으로 이끄는 개의 문장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 뺄셈이 이루어진다. 배제하고, 차별한다. 서로 존중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았으면 한다. 기자는 일본인들이 이런 말을 한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자꾸만 분열했다. 이는 한국 정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상대와 조금이라도 다르면 분파가 만들어지고 서로 치열하게 싸운다." 글을 쓰다 가도 이런 식으로 빠지는 '기레기'들의 글이 문제이다. "한국의 가장 적폐는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라는 말을 자기 말도 아니고, 그냥 일본의 지인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냥 사회통합하자고 한다. 이게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해 하는 이들의 논지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적폐청산과 사회통합 중 무엇이 중요한가? 답은 간단하다. ,폐수는 먼저 정화조나 하수처리장을 거친 뒤 에야 강물과 '통합'할 수 있다. 청산 없는 통합은 오염일 뿐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주절거림'이다. 그래 문자기호를 쓴다. 우리도 마침표를 찍고 머뭇거리다, 다른 문장을 말하곤 한다. 그래도 뉘앙스(Nuance, 미묘한 차이) 알아보는 것이 인문정신이다. 예민함이 필요하다. 아침 사진은 어제 오후 동네 공원에 올라 녹지 않은 눈을 만난 것이다. 지는 해를 그림자가 차이를 보인다.

 

 

차이를 말하다/천양희

 

그날 당신은 다르다와 틀리다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지요 당신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고도 말했지요 그 말 듣는 날이 얼마였는데 어떤 일이든 절대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다니요 정도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또 몇 번이나 자기를 낮추는 것과 낮게 사는 것은 다른 것이라 생각했을까요 고독 위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당신은 독락당(獨樂堂)에 우뚝 세워놓습니다 오늘은 독수정(獨守亭)이 고독을 지킵니다 처음으로 즐기는 것이 지키는 것과 정도 차이라고 당신은 말합니다 내 의견에 한 의견을 슬쩍 올려놓고 보아요 그래도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내 생각 깊은 자리 한 생각 잠시 머뭇거려도 그 자리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요 저 자연스러움과 자유스러움의 차이 그 차이로 차별 없이 당신과 나는 당신과 나를 견뎠겠지요 다르다와 틀리다 사이에서 한나절을 또 견디겠지요.

 

 

융합은 협력이나 대화가 아니다. 정희진 선생에 따르면, 원래가 대화와 상생은 쉽지 않은 것이라 했다. 나도 동의한다. 나도 최근에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기가 힘들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글을 읽고 나는 위안을 얻었다.

 

  • 지구 상에 있는 78억명의 인간이 살며, 78억개의 개별적인 몸이 있다 모두 대체불가능한 몸들이다. 각자가 말하는 순간, 발화 내용은 몸의 외부 환경과 섞이게 된다. 타인과 사회의 해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 본래부터 소통이 쉽지 않은 것이다.
  • 말하는 사람마다 젠더, 계급, 인종 사회적 위치가 다르다. 때문에 저마다 자기 입장이 있다. 지배자의 입장을 내면화하든, 통념과 상식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든, 모든 개인은 입장이 있다.

 

차이는 상황과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상황에서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무섭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차이는 개인차일 뿐이지. 집단 전체를 특정 지을 있는 동일성은 없다. 조심해야 사유이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모든 언설(discours)에는 전제가 있다. 저절로 생겨난 말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는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는 답을 필요가 없다. 융합적 사고는 언설의 전제를 알고, 기존 지식을 자기 관점에서 대응하는 것이다. 동문서답은 소통이 안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지만, 사실 인생은 동문서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동문에는 서답이 정답이다. 안내나 모르는 것을 묻는 학생의 질문 목적이 분명한 간단한 소통 외에는, 거의 모든 영역의 대화는 참여자의 생각을 바꾸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미 정해진 통념이 있거나 '사이다 발언'으로 상대방을 이기려는 데만 목적이 있는 같다. 논리도 상식도 없는 스트레스 해소를 논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모든 언설에는 전제가 있다는 말을 것이다. 저절로 생긴 말은 없다. 말은 권력관계의 산물이다.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는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융합적 사고는 새로운 앎을 지향하므로, 객관성을 주장하기 보다 객관성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관심이 있다. 시대와 장소, 말하는 사람의 위치, 정치적 상황 수많은 요소에 의해 객관성의 내용은 다르게 구성된다. 그래서 융합적 사고에서는 객관성보다 '상황적 지식' 주장한다. 상황적 지식은 지식이 만들어진 조건을 천착한다. 어떤 조건에서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졌는가? 과정을 알면, 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있다. 모든 지식은 특정 맥락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지, 만사 적용되는 지식은 없다.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이상을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가질 없다. 모르는 것도 아는 한도 내에서만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아는 내에서만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할 있다. 최근에 스마트폰의 발달로, 검색은 정보를 얻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검색은 정보를 얻는 방법이 아니다. 이미 머릿속에 입력된 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무언가를 전혀 알지 못하면 검색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정확하다는 보장도 없다. 검색은 입력창에 아는 것을 넣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은 입력할 없다. 모르는 것은 다른 경험이 없다면 영원히 모르는 세계이다.

 

그래서 빈부격차보다 무서운 현상이 지적 양극화이고, 급속도로 실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인터넷(Inter-net) 단어 그대로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특정 정보만 담는 그물망들의 간격이다. 우리가 찾는 정보는 이미 누군가 놓은 그물 안에만 존재한다. 인터넷은 항구에 정박된 여러 가지 선박들일 뿐이다. 그런 배에서는 고기를 잡을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종이신문을 열람하는 것과 이미 누군가의 수차례 선별을 거친 온라인 기사를 읽는 것은 같은 행위가 아니다. 모니터는 내가 읽은 것이 어떤 맥락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는 인터넷 정보만을 맹신하면서 자기 생각은 없고 고집 사람들만 늘어나고 있디.

 

수험서와 참고서로만 채워지지 않은 다양한 책이 구비된 동네 서점, 좋은 책인데 알려진 책만 모아 놓은 서점, 장서가 많은 도서관을 바란다. 융합은 고정관념과 충돌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안목을 넘어 선구안(選球眼) 기르려면, 우리 몸을 덮어쓰고 있는 그물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래 나는 인문운동가의 글을 '꼼꼼하게' 읽었으면 한다. 어렵고 길더라도, 문제 제기를 하려면 우선 선구안(選球眼)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야구에서 사용하는 '선구안'이란 말이 나는 좋다. 선구안은 지식 전반, 국가 경영, 사회의 성숙, 개인의 인생 모든 분야에 적용할 있는 좋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판단력, 안목, 착목 지점, 문제의식, 질문'이다. 공동체의 운명은 지도자와 구성원들의 선구안에 달려 있다. 야구에서 타석의 선수가 매번 공을 판단하듯, 스트라이크 존은 앎과 삶의 범위를 상징한다. 인생은 거창하지 않다. 일상이다. 지식은 일상의 순간 필요한 수많은 양식, 문법 하나일 뿐이다.

 

융합은 모든 지식을 습득한 다음, '녹여서 합하는 ' 아니다. 융합의 가장 근접한 의미는 다음 한자어의 통섭(通攝)이다. 한자어의 통섭(統攝)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 융합은 크게 다음과 같은 가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첫째는 학과별로 전문화가 심화되면서 대두한 전인적 교육의 필요성, 둘째는 서구 남성 중심 지식으로 해결할 없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가시화하는 새로운 사유 방법론으로 등장했다. 다른 생각과의 접촉, 닿음에서 발생하는 불협화음과 충돌이 융합의 주요 요소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대화에서 최선은 "동의하지 않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도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이해도 쉽지 않다. '머리' 아니라 존중과 열린 마음, 지적 호기심, 인격이 갖추어 져야 가능하다

 

융합은 타학문과의 대화를 통해 지식을 확장하거나 공통점을 찾는 작업이 아니다. 지식이 필요한가라는 질문, 자식의 쓸모와 가치에 관한 논쟁이다. 봉건 시대를 넘어서 , 신분 질서, 자연을 물리치고 인간이 앎의 주체가 되면서 지식은 다다익선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식 자체가 숭배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계몽(啓蒙, des lumières)주의가 나온다. 많은 지식으로, 특히 백과사전 지식으로 무지 몽매한 대중에 빛을 제공한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21세기에 와서 많은 지식보다 지식이 필요한가를 우리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점이 내가 인문운동을 하게 게기이다.

 

문명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전쟁은 지식을 양에서 가치관 문제로 이동시켰다. 융합의 반대말 하나가 거대담론(grand theory)이다. 거대 담론적 자아는 모든 것을 설명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선 타자가 알아야 것은 프로야구의 전반적인 이론이 아니라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 표정, 그가 직전에 던진 공이다. 같은 작은 단위들의 연속이 인생이다. 비슷한 말로 '신은 디테일에 있다', '오늘을 산다'. '성황'. '맥락' 등이 알아야 것이다.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앎의 규모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플라톤, 공자부터 공부할 필요가 없다. 지금-여기에서 내가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면, 고전과 만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려면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부터 깨달어야 하고, 깨달어진다. 전제는 자신의 포지션(사회적 위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실천의 분리'라는 말은, 지식의 소용에 관한 질문이다. 이론과 실천은 원래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지식이 쓸모가 없을 , 이런 말이 나올 뿐이다. 현실에 맞는 이론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소용 이론을 만들면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사유는 고통스럽고 어려운 노동이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현실을 가위로 잘라 없는 상태로 만든다.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의 드러나지 않은 고통은 권력 화된 무지의 대표적 효과이다.

 

지식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이다. 융합은 새로운 , 변태(變態) 과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연속선에서 몸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다른 지식이 생산된다. 변태는 알아가는 , 변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야구로 말하면, 단지 당면한 카운트가 우리의 현실이다. 지식은 야구장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존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타자의 포지션에서 앎이 시작된다.

 

앎은 구조 속에서 자기 자리를 인지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앎은 존재의 GPS 설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파악한 다음에 가능한 질문이다. 자신의 포지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도, 지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모든 지식은 특정 상황,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융합에서 포지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식의 본질적 성격인 부분성이 객관, 전체, 과학, 중립 등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식자의 위치성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 그래 융합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한 위치성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조직화하는 공부다. 창의적일 수밖에 없는 방법론이다.

 

우리가 세계를 보는 모습은 모두 일부분이다. 자기 인식이 부분적이라는 진리, 각자의 당파성을 인정해야 한다. 부분적 지식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성찰적 지식이다. 지식의 구성은 정치적 투쟁의 산물로 경합의 과정이다. 자기 위치성을 인식한 사람만이 당파성과 보편성이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안다. 논쟁에서 이기는 첩경은, 자기 포지션과 상대방의 포지션을 모두 파악할 때이다.

 

만물은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자신이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 여론을 주도하거나 지도자가 공동체는 위험해 진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있는 존재이다. 성별, 계급, 인종, 지역 사회적 모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물론 기득권자나 사회적 약자 모두 자기 정체성을 아는 과정은 쉽지 않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혼란, 보이던 세상이 드러나는 놀라움과 두려움, 지적 호기심, 자기를 아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미로를 헤매는 일이다. 위치성은 놓여진 현실임과 동시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이동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사회, 인간관계,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숙고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자리() 포지션이라면, 이를 인식하거나 이동하는 과정이 역지(易地), 포지셔닝이다. 역지사지는 공감을 넘어서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다. 기득권자는 자신이 손해보는 역지사지가 싫고, 피억압세력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상태 자체가 고달프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위성(GPS) 앎의 본질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학 없이 모든 지식은 언어(인문학)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도 언어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언어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다. 글의 주장과 무관하게 일단 글은 읽혀야 한다. 문장이 짧고, 감정적 표현은 자제할수록 좋다. 그러나 나는 가독성보다 생각하는 읽기를 권한다.

 

우리 사회의 담론 형성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한국 사회는 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다다. 나는 이런 발전주의에 반대한다. 발전주의는 국가나 공동체 간의 힘의 경쟁이다. 강자들끼리 경쟁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자연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결과가 팬데믹이다. 평화 운동도 내부에 대립적인 사고가 공존한다. 일상과 사회 구조 차원에서 평화를 만들어가자는 평화운동과 평화는 힘에 의해서만 지켜진다는 평화=전쟁을 주장하는 현실중의 국제정치학도 평화를 다룬다. 그리고 생태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근본적으로 자연을 인간 활동의 대상으로 삼지 말자는 주장과, 녹색 성장이라는 말처럼, 국정지표가 되기도 한다. 융합 공부는 기존 지식은 물론이고 지식과 융합할 있는 자기 가치관을 확립하여야 된다. 자신의 관점을 확립하고 응용하려면 연습(practice) 현실 개입적 실천(praxis) 모두 필요하다. 융합은 주체(사람) 가치관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융합은 가치관에 따른 지식의 재구성이다.

 

댓글: 인간은 누구나 동질감의 감성은 인정하고 시대의 변화무쌍에 적응된 인공지능의 발걸음을 맞춰가는 융합의 세계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