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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入於禮, 成於樂)

1547.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2월 23일)

 

나에게 아침 시간은 큐티(QT) 시간이다. 묵상이나 기도를 하는 quiet time이다. 오늘 아침은 분의 글을 갖고 공부를 했다. 하나는 배철현 선생의 <월요묵상>이다. 거기서 다음 문장을 만났다. "[사람들은] 정신적인 고양을 위해서 공부한다고들 하나, 사실은 자신의 재물, 명성, 그리고 조그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하는 척하는 것이다. 공부는 자기를 없애고, 예수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의 추한 십자가를 남들 앞에서 과감하게 짊어지는 용기다. 공부는, 자기 결점의 발견이며, 자기 개선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깨달음이지, 자신하고 상관없는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구태의연한 자신의 삶이 언행을 통해 조금씩 수정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유효하다."

 

내가 최근에 기억하려고 애쓰는 문장이 루가복음 9 23절이다. "누구든지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 방점을 찍는다. 그래 아침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하나> 쓰며 공부한다. 확실하게 정신이 고양된다. 그러면 자신의 일상의 언행을 조금씩 수정하려고 노력한다.

 

번째는 윤정구 교수의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만난 문장이다. "흔히들 새로움이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무에서 유를 만들려고 맨땅에서 헤딩하다 결국 실패하면 눈을 돌리는 것이 벤치마킹이다. 남의 것을 빌려 오면 유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벤치마킹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원리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새로운 것이 조직에 발 못 붙이게 만드는 원리다. 새로움을 만드는 근원적 변화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있는 것을 날줄로 삼고 또한 날줄로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인 목적을 씨줄로 삼아 새 맥락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유인 존재이유에 대한 성찰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힘들다." 번주가 공동체 공모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는 마지막 주간이다. 머리가 복잡하였는데, 위의 글을 읽고 정리가 되었다. "이미 있는 것을 날줄로 삼고 또한 날줄로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인 목적을 씨줄로 삼아 새 맥락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유인 존재이유" 버리지 않는 일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어서 봄이 어서 가까이 오길 바라면서, 박노해 시인의 것을 택했다. 박노해 시인의 원래 이름은 박기평이다. 그는 노동운동가 시절 '박해 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문구에서 글자를 따서 박노해라는 필명을 만들었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나는 나의 일상을 바꾸려 한다. 빨리 날이 풀려 주말농장에 나가 오늘 시처럼 생각이다. 물론 정신과 육체의 고양을 위해 공부를 손에 놓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에 읽을 글처럼, 시에서 감성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 바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된다는 말인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入於禮, 成於樂) 삶을 살고 싶다.-

 

 

세 가지 선물/박노해

 

나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은

단 세 가지

 

풀무로 달궈 만든 단순한 호미 하나

두 발에 꼭 맞는 단단한 신발 하나

편안하고 오래된 단아한 의자 하나

 

나는 그 호미로 내가 먹을 걸 일구리라

그 신발을 신고 발목이 시리도록 길을 걷고

그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저녁노을을 보고

 

때로 멀리서 찾아오는 벗들과 담소하며

더 많은 시간을 침묵하며 미소 지으리라

 

그리하여 상처 많은 내 인생에

단 한 마디를 선물하리니

이만하면 넉넉하다

 

 

지난 주부터 일주일 번씩, <다산의 마지막 습관> 읽으며 공부하고, 거기서 삶의 통찰을 얻는다. 오늘 아침은 동양 고전이 말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사유해 본다. 공자는 <논어> "태백" 편에서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入於禮, 成於樂-시에서 감성을 일으키고, 예를 통해 바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된다)" 말을 했다. 자신도 3-4 전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해보니 그렇다. 시와 음악은 감성을 키워주는 예술이다. 반면 예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지켜야 덕목이다. 그래 가지를 묶어 공자는 개인의 수양을 위해 가장 소중한 도구라 말한 같다. 그러니까 사람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덕목으로 '인의예지' 위해서는 반드시 시와 음악 그리고 예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 본다.

시란 마음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공자는 <시경>에서 "시란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 속에 있으면 뜻이라고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했고, <서경>에서는 시란음이 바라는 바를 말로 표현한 것이며, 노래는 가락에 맞추어 말하는 "이라 했다. 그리고 <논어>에서는 시의 목적이 감성을 키워주고, 감정을 순화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는 시를 짓는 사람이나, 시를 감상하는 사람에게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시인은 자신의 뜻을 담아 시를 짓고, 시를 듣거나 읽는 사람은 시를 통해 감동을 받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를 소리로 낭독하면, 목소리도 늙고, 정서의 폭과 깊이가 생긴다고 한다. 생각에 시를 읽으면 다음과 같은 가지가 좋아진다 본다.

  1. 시를 읽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영혼의 떨림을 알게 된다. 특히 나는 이런 단어에 끌리는 구나, 이런 소재에 반응하는구나, 이런 문장에 마음을 내어주는 구나, 몸의 반응을 느낀다.
  2. 시를 읽으면, 내가 시적화자가 되어,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배양되기도 한다. 어떤 시는 모르는데, 시를 읽는 순간 몸을 파고 든다. '파고든다' 것은 나도 모르게 시적 상황에 깊이 스며든다는 것이다.
  3. 시를 읽으면, 일상의 새로운 , 일상에서 자기가 쓰고 있는 언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어휘의 숫자를 향상 시킬 있다. 그리고 시를 읽으면, 질문을 발견할 있다. 인문정신의 핵심은 질문하기이다. 질문 그거 싶지 않다. 시를 읽으면, 나의 발견, 타인의 발견, 일상과 언어의 발견 그리고 다르게 보기의 발견이 된다. 발견은 단숨에 사그라지지 않고,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에는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정서가 있다. 주자(朱子)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의 성정에는 원래 바름과 악함이 있어서 옳고 그름을 쉽게 있다. 억양이 반복되어 사람의 마음을 쉽게 감동시킬 있다. 그러므로 처음 배우는 사람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나쁜 짓을 미워하는 마음을 스스로 일으킴으로써 쉽게 그칠 없게 한다." 시가 선과 악을 쉽게 가르치고, 반복하는 데에서 생기는 가락을 통해 듣거나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나가게 한다는 것이다.

 

다음 예로서 바로 있다는 말은 타인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공자는 <논어> 마지막 문장을 삼부지(三不知) 끝맺는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없고(不知命 無以爲君子也), 예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당당히 없으며(不知禮 無以入也),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없다(不知言 無以知人也)." 마지막 문장을 다르게 말하면,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사람을 없다. 지언(知言) 상대방의 말을 듣고 말이 어떤 심경에서 나왔는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일을 뜻한다.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 아니라, 예절은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예를 모르면 바로 없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행동거지 하나부터 찬찬히 다스리고 인생의 태도를 바로 세워야 타인과의 관계도 바르게 맺을 있고 자기 수양도 이를 있다.

 

끝으로 음악은 간정을 순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보다 중요한 역할은 조화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주자는 "음악은 오성(다섯 ) 십이율( 가락) 통해 춤과 노래를 함으로써 사람의 성정을 기르고, 더러운 것을 씻어낼 있게 한다. 의가 정밀해지고 인이 완숙해져서 스스로 도덕과 조화를 맞출 있게 되므로, 배우는 자의 끝은 반드시 음악을 통해 이를 있으니, 이것이 학문의 완성이다"라고 했다. 사람이 지켜야 기본 덕목인 인과 의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감성과 성품이 바탕에 있어야 하며, 이러한 감성과 성품은 음악과 같은 예술을 접하는 경험을 통해 길러진다. 공자도 자연스럽게 도덕과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글만 파는 데에서 머무르지 않고 예술을 자주 벗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나아가 예술이 배움은 물론 삶의 완성에까지 이를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고 봤다.

 

다산 정약용도 18년간의 귀양살이 동안 시와 음악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고 스스로 시를 짓고 음악을 즐김으로써 고난을 이길 힘을 얻을 있었다고 한다. 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아름답고 간결한 언어로 삶을 빛나게 한다. 시를 직접 짓지 않더라도 누군가 자신과 시절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시를 가까이할 있다면 삶을 이해 받은 같은 위로를 느낄 있다. 또한 다산은 음악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다산을 비롯해 경지에 올랐던 사람들은 음악을 취향이 아니라, 수양의 도구로 삼았다. 사람과 세상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수양의 목적이자 결과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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