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시입니다.
1181.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젯밤 내 스마트폰의 메시지에는 코로나19 확진 환자의 동선이 시간대 별로, 해당 업체의 이름까지 명기되어 전달되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주변에 가지 않는다. 자영업자는 두 번 죽는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아야 우리는 덜 안타까울 수 있다. 환자의 동선을 공개하는 이유는 아주 짧은 잠복기(1일-14일)를 가진 전염성 강한 코로나19가 역학조사보다 빠르게 전파될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함이고, 동시에 행여 역학조사에서 누락되는 일이 없도록 안내하려는 것이다. 예방은 과해도 괜찮다. 그리고 소독을 실시하면 안전하다. 그건 상식이다. 전염을 최소화 하려는 궁여지책이다. 접촉 의심자는 예방을 위해 관할 보건소나 1339로 문의하고, 외출을 자제해야 한다. 그게 공동체 의식이다. 언젠가 <나는 왜 인문운동가를 자처하는가?>란 글을 적어 둔 적이 있다. 나시 한 번 꺼내 읽어 본다.
우리 사회는 지금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천박한 물신주의와 인간의 가치를 인격이 아닌 기능에서 찾으려 하는 비인간화라는 시대적 질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의 약은 '인문정신', 즉 인문적 가치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되살리는 것이다. 그 역할이 인문운동가이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자각, 아니 사람됨의 깨달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대 경쟁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고 있는 삶의 작동 기제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이다. 올림픽에서 외치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를 찾거나, 더 높은 성공의 열차에 타려고 발버둥친다. 과학 기술도 기하급수적인 속도 빨라지고 있다. 기업들은 더 먼 데까지 새 물건을 갖고 달려가기 위해 경쟁한다. 이런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올림픽 정신과 그 반대에 있다. "더 낮게, 더 느리게, 더 가까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다가려 하는 노력이다. 그러니까 인문정신은 소외된 자리를 향하는 연민의 마음으로 낮은 곳을 바라보는 일이고, 느긋하게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일이고,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친화력이다. 이런 인문정신이 사회에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선진 사회가 된다. 그러니까 선진사회는 선진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선진문화는 인문정신이 밑에 배어 있어야 한다. 산업화니 민주화는 선진사회를 위한 전제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다시 한 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 정신은,
• 소외된 자리를 향하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연민(憐憫)의 마음,
• 느긋하게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는 여유(餘裕)의 마음,
•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공감(共感)의 마음이다.
연민은 '내 마음 속에 들어온 당신의 슬픔'이다. 연민의 사전적 정의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이다. 타인의 슬픔에 대한 가장 좋은 위로는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 못지않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연민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마태복음 25장 40절을 보자.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 너희들이 내 형제와 자매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연민이라는 단어의 compassion은 com+passion이다. 여기서 com은 '함께'라는 접두어이고, passion은 '정열'이라는 뜻이지만, 대문자로 Passion하면 '예수의 수난'을 말한다. 연민(compassion)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 같은 말이다.
다른 생명을 돌보지 않는, 특히 나보다 더 힘든 그리고 약한 사람을 돌보지 않는 세상은 봄이 와도 춥고 쓸쓸하다. 언젠가 권선필 교수가 페북에서 말한 문장을 적어 둔 적이 있다. 오늘 다시 꺼내 공유한다. "세상과 이웃을 돌봐야 할 이들은 온통 다른 그 누구만 떠올린다. 그가 돌봐야 한다고. 조금 더 지적인 사람은 제도와 구조를 가지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이웃과 생명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선이 비워진 자리엔 악이 그득하고, 그 악은 제가 악인 줄 모른 채 삼킬 자를 찾기에 바쁘다. 서로를 돌보지 않는 세상은 그렇게 더욱 춥고 쓸쓸해 진다."
나는 어떠한 가? 나는 적어도 '삼킬 자'를 찾지 않는다. 주변의 일부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 하고, 주변의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그런데,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사회의 적폐들이 날 뛴다는 점이다.
그 다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여유이다. 힘들 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마음의 빈 공간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같은 일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는 동료의 실수를 무능함이 아닌 피곤함으로, 짜증을 연민으로 바꾼다. 만약 인생이 하나의 긴 문장이라면, 거기엔 반드시 쉼표가 필요하다. 외출을 자제하고, 집단 행사 참여를 자제하라고 한다. 넘어진 김에 쉬라고, 이때 필요한 것이 마음의 여유이다.
여유의 반대인 불안이나 초조는 결핍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여행을 위한 짐 싸기를 살펴 보면, 큰 가방으로 짐을 싸는 사람은 운동화나 우산을 넣을 때 그저 운동화가 필요한지, 우산이 필요한지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작은 가방으로 짐을 싸는 사람은 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선택을 쉽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산을 넣지 않았다가 혹시 비가 오면, 운동화를 넣지 않았는데 산에 올라가게 되면이란 가정 속에서 계속 흔들리며 불안하게 되는 것이다. 주말이면 사람들은 일정을 비워 두고,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사치를 누린다. 아무 것도 고르지 않을 여유를 주는 것이다. 유대교의 안식일 역시 결핍의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어느 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를 막는 인류의 발명품이다. 뉴욕 맨해튼 중심의 센트럴 파크를 구글 맵에서 보면 텅 비어 있는 사각형의 녹색 공간으로 보인다. 맨해튼의 도시 설계자였던 로버트 모지스는 설계도중 자신이 들었던 귀중한 조언을 이렇게 증언한다. "만약 맨해튼의 중심부에 큰 공원을 설계하지 않으면, 5년 후에 똑같은 크기의 정신 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럴 때일수록 세계와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공감(共感)의 마음이 필요하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이란 책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Sympathy, 동정)보다 타인을 향한 공감(Empathy, 감정이입)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이다.
공감은 타인에 대한 걱정이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사랑의 기술이다. 자기 자신의 고통은 육체로 직접적 느끼면서 타인의 고통은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의 기술을 잃어버렸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감수성이 무디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공감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가 나에게는 공감과 연민이 둘 다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자비에서 '자'는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이기 때문에 연민이고, '비'는 타인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이니까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면에서 공감이라고 본다.
공감이란 말의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 어떻게 심리적 심정지 상태에 있던 이들의 심장이 다시 뛰는지 보면, 이런 식으로 하는 공감이 답이다. "그럴 수 있어, 네 감정이 옳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무작정 들어 주기만 하는 경청이나 무작정 호응만 해주는 공감이 아니라, 적정 처방이 필요하다. 그는 발이 가려운데 구두를 긁지 않는다. 가려운 맨살을 만진다. 맨살이란 존재 자체이다. 아픈 이의 마음과 감정이다. "몇 시간이나 얘기를 들어줘도 말하는 사람도 경청한 사람도 개운치 않는 것은 과녁이 정확치 않아서 이다. 사건이나 상황 자체에 휘둘려 존재 자체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읽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서 그녀는 "적정 심리학"라는 말을 한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로 진입하면, 거의 모두가 치유된다고 한다. 예컨대, 태극기 할아버지도 그의 존재에 집중했을 때 할아버지는 드디어 세상이 아닌 나의 얘기를 꺼내고, 과거 상처들을 토해 내며 사과까지 한다고 한다. 그건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지 않고, 그 할아버지의 가슴으로 직접 진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도 여기서 많은 것을 배운다.
이 책은 학교에서 친구를 때리고 문제를 일으켜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훈계를 하는 따위의 도덕 교고서가 아니다. 그때조차 사건이나 상황의 포탄을 피해 그의 감정에 주목해 듣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행동까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감정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 '네 감정이 옳다'고 공감해주는 것이다. 그런 공감을 받은 후에야 안정감을 찾은 아이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자기 진영에 놓여, 반대하기 보다 "적정 심리학"으로 타인과 공감하려는 마음이 절실히 필요한 지금이다. 공감은 타인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공감한다는 것은 "타인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라 본다. 오늘 아침 사진은 옛 우리 선비들이 이웃을 보듬던 마음이 담긴 것이다. 이웃을 위해 굴뚝을 높이지 안했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보 잘 것 없는 것도 품어주는 마음이다.
참 따뜻한 주머니/박소란
길바닥에 떨어진 십 원 짜리
십원으로 무엇을 살 수 있나요
아무 것도 너는 살 수 없어 말하듯
단호한 표정으로 흩어지는 풍경들,
겨울
언젠가
한 닢의 십 원 짜리를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출 사람
허름한 전구를 만지작거리는 것처럼
조심스레 눈동자를 밝혀 들고
값싼 화장이 뭉개진 작고 동그란
얼굴을 넌지시 들여다 볼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겠지 나는
곁에 누웠던 누군가 황망히 떠난
새벽 한때의 여관방 같은 보도블록 위
십 원 짜리
십 원 짜리를 주워 살그머니 제 주머니
속으로 들일 사람
주머니는 참 따뜻할 텐데
붉은 담요를 두른 손이 있어
찬 등을 가만가만 쓸어줄 텐데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
기다림이 기다림의 잃어버린 모양을
문득 알아볼 때까지
별수 없으니까, 바닥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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