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0.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2월 16일: 오늘 내가 당당한 까닭은 어제 내가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평범한 일상들이 쌓이고 쌓여 비범해 졌을 때 우리는 그 일상을 '위대하다'고 하며, '평온(平穩)'하다고 한다.
나는 5년 전부터 일상을 지배하여야 한다고 다짐하고, 아침에 일어나 감사일기를 쓰고, 시를 하나 고르고, 내가 직접 찍은 사진과 연결시키고, 한 편의 에세이를 쓴다. 고미숙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을 읽다 보면, "글쓰기는 노동이면서 활동이고 놀이이면서 사색이다" 이란 문장이 나온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글쓰기란 좋은 노후대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에게 글쓰기는 하나의 배움의 장이다. <관자>라는 책의 한 구절에서, 나는 '지무허사(志無虛邪)'라는 말을 알았다. 그 말은 배움에 임할 때, "뜻을 허망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은 배움을 위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겉모습, 즉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법을 공유한다. "얼굴 빛이 안정돼 있으면 마음도 경건해 지므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옷매무시를 항상 단정히 하라. 아침저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하며, 마음을 작게 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면서 조금도 나태해지지 않는 것을 '배움의 방법'이라고 한다." (<관자>)
나는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배철현 고전문학자의 <월요묵상>을 꼭 읽는다. 나는 거기서 매 번 깊은 통찰을 얻어간다. 오늘 아침 주제인 평온이 실제 나를 평론하게 해준다. 그래서 나는 다음 글을 두번이나 읽었다. 좀 길지만 공유한다.
"인간을 신적으로 만드는 궁극적인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는 벼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부화뇌동 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몰입하는 마음, '평온(平穩)'이다." 편안하고 평온은 뉘앙스(nuance,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평안과 달리, "평온에는 의심, 공포, 걱정, 근심,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평온한 인간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조용한 희열에 휩싸여 있다. 매일 매일 외부에서 눈과 귀를 통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평온을 유지할 능력이 있다면, 그는 이미 극락과 천국을 지금-여기에서 구현한 자다. 삶이라는 예술작품의 궁극적인 성배는 '평온'이다. 평안은 일시적인 상태라면, 평온은 지속적인 상태 같다. 평온의 사전적 해석이 "조용하고 평안함"이다.
어쨌든 이 능력을 가꾸고 신장시키는 훈련은 쉽지 않다고 배철현은 말한다. "곳곳에 평온을 흔들려는 적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와 부러움, 욕망, 식탐, 분노를 일으키는 잡담들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부여잡고 평온을 실천하는 것은 거의 신적인 경지다. 중심 자리를 타인에게 넘겨주면, 인간은 초라해져 주변으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들로 무장한다. 우리를 코로나 시대의 불행에서 구원할 가장 유용한 도움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도움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에픽테토스(55-135년)의 제자인 아리안은 그의 강의를 요약하여 <엔키리디온(Enchiridion, 번역하자면 <인생수첩>)이란 책을 남겼다. 이 책의 첫 구절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생에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들이 있고, 그렇지 않는 것들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돈, 물질적 소유, 인간관계, 타인의 주장, 의견, 행동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의 수준과 상태 등이다. 우리 대부분은 '외적인 것들'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과 힘을 소진한다.
"이런 외적인 것들이 우리 삶에 평안과 편리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성적인 인간은 건강보다는 병을, 부보다는 가난을, 자유보다는 억압을, 명성보다는 오명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외적인 것들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방식이나 목적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욕망하는 외적인 것들을 만족스럽게 얻지 못하면, 좌절하고 불안하고 우울의 늪에 빠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을 획득하는 데 성공해도 그것들을 잃을까 봐 안절부절 못하고, 그 만큼 더 커진 욕심으로 불만은 더 커진다."
배철현은 "삶의 예술인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이 있다. 이런 외적인 것들을 자기 삶의 주인자리에서 내몰아내는 일이다. 평온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은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 로부터 마음을 탈출시키는 자유다." 멋진 통찰이다. 가끔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이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 로부터 온다.
"자유란 내가 외적인 것을 획득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그것을 모두 잃은 경우에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마음 상태다. 평온은 깊은 묵상을 통해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유일무이한 임무를 '의도적이며 섬세하게 선택'할 때 등장한다. 그 선택은 결과에 상관없이, 아니 과정을 결과로 변모 시키는 평온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글은 잠시 멈추고, 시를 한 편 읽는다. 나를 평온하게 해주는 시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오늘 아침 사진을 보면, 자연은 바람이 불어도 평온하다.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배한봉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수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
<대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즉 일상을 지배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다. 이를 우리는 수신(修身)이라 한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를 일러 수신이라고 하니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 몸과 마음의 연관성을 말해 주는 구절이다. 수신의 전 단계가 정심(定心)이다. 몸을 바르게 수신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바르게 정심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마음이 바르게 되려면 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이치와 통한다.
<대학>은 3강령 8조목이다. 3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면서(新民),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경지 이르게 하는 것(止於至善) 이다. 우리 가슴 속에 명덕(밝은 덕)이 확고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면 자연히 사람이 새로워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높고 넓어진다. 그러면 겸손하게 되고 남을 욕하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게 된다. 그래서 더할 수 없이 훌륭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강령이란 우리들의 행동규범, 또는 행위준칙이 한다.
8조목은 3강령을 실현하는 단계이다. '격물, 치지, 성의, 정심,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이다. 사물의 이치를 규명한 뒤에 지혜에 이르고, 지혜에 이르게 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된다.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야 몸이 닦인다. 몸이 닦인 뒤에 야 집안이 가지런해 진다. 집안이 가지런해 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진다.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화평해 진다. 머릿속에 넣고 늘 기억해야 한 기본이다.
앞에서 말한, <관자> 글 중에, "마음을 적게 해서 공경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말이 나는 좋다. '마음을 적게 하다'는 내가 늘 생각하고 사는 것인데, 가끔씩 그 말을 잊고, 나를 '미친 존재"로 드러내려 할 때가 있다. 평소 늘 '시시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타자 윤리학'을 연 레비나스의 용어 중에 '농-리외(non-lieu)'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우리 말로 하면 '자리 없는 자리'라는 개념이다. 그 반대말이 우리가 흔히 쓰는 '미친 존재'이다. 그러니까 '농-리외'는 '무위진인(無位眞人)', 즉 없는 듯 자리하고 있는 '진짜 모습'이다. 가면을 쓰지 않은 맨 얼굴의 모습이다. 맨 얼굴 인 사람은 '어떤 자리도 없는 참다운 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이다. 나는 '나'답고 싶다. 가면을 쓰면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다. 일체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진짜 ‘나’다운 사람이다. 이런 것들이 내가 이해하는 '마음을 적게 하는' 일이라 본다.
<시경>에서는 이를 '소심익익(小心翼翼)'이라 한다. 이 말은 '마음 작게 하고 모든 일을 조심하고 삼가며 처신함'을 의미한다. 마음을 세심하게 쓸 조심을 하자는 말이다. 소심한 성격에 대한 비난 보다는 매사에 신중하고 공경하는 자세에 대한 칭찬 같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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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의 글을 보다 보면, 올바른 배움의 자세, 다시 말하면 하루 일상을 사는 자세는 바른 마음과 함께 겉모습의 경건함을 함께 지녀야 한다고 했다. "얼굴 빛이 안정돼 있으면 마음도 경건해 지므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옷매무시를 항상 단정히 하라." 그러니까 마음이 바로 서야 뜻이 허망한 곳으로 흐르지 않고, 겉모습이 빈틈이 없어야 올바른 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논어> "안편"에도 나온다. 누가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이렇게 물었다. "군자는 본디 바탕만 갖추고 있는 되는 것이지, 겉모습이나 형식을 꾸며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공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 "무늬도 바탕만큼 중요하고, 바탕도 무늬만큼 중요합니다.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에 털이 없다면, 개와 양의 가죽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겉과 속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말이다. 학문과 수양을 통해 내면을 잘 갖췄다면 겉으로도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면의 충실함은 엄정한 겉모습이 뒷받침되어야 하듯이,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다면 하루하루의 충실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일상은 단지 하루만의 모습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쌓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모습이 누적되고 쌓이면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오늘 내가 당당한 까닭은 어제 충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주었던 훈계를 들어본다.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높이 두며, 묵묵히 바로 앉아 공손하기가 마치 흙으로 빚은 사람 같고, 말은 도탑고도 엄정해야 한다. 이와 같은 뒤에 야 능히 뭇사람을 위엄으로 복종시킬 수 있고, 명성이 퍼져 마침내 오래도록, 멀리 까지 이르게 된다."
이는 스스로의 삶이 곧 배움 이며, 일상이 곧 배움의 장소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모습이다. 다산 정약용 자신도 자신의 삶이 가르침과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고사가 바로 그가 가진 당당함의 근본을 말해준다. 흙으로 빚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글을 썼던 엄격함이 있었기에 그의 위대함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평범한 일상들이 쌓이고 쌓여 비범해 졌을 때, 우리는 '위대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충실함은 엄정한 겉모습이 뒷받침되어야 하 듯이,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다면 하루하루의 충실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로, 말하기는 쉽지만, 그 실천을 엄청난 '엉덩이의 힘'이 있어야 한다. 일상은 단지 하루만의 모습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쌓아가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누적되어 축적되면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 습관이 중요하다. 일상을 지배하는 습관을 들이면 그래도 좀 낫다. 실제로 우리 대부분의 삶의 줄거리는 드물게 이벤트나 축제처럼 솟아 오르는 순간이 아니라, 내내 침전된 일상의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줄거리는 드물게 이벤트나 축제처럼 솟아 오르는 순간이 아니라, 내내 침전된 일상의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일상을 지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다. 배철현은 버락 오바마와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배경에 상관없이 자기에 집중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행복은 누구에게나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고유한 것을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일상에 충실한 사람은 인연의 마주침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인연의 흐름에 응답할 뿐이다. 그러면 그 인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생각과 두 손으로 시도하여 그 가시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나의 욕심에 근거한 허상들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인생수첩>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엔, [생각으로 걸러진] 의견, [충동을 억제한] 선택, [무엇을 얻고자 하는] 욕망, [무엇을 피하고자 하는] 반감 혹은 회피,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엔, 육체, 재산, 명성, 고위직,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로 결정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원래 자유롭고, 거침이 없고, 타인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은 힘이 없고, 누군가 에 매여 있고, 타인에 의해 방해를 받으며, 다른 사람에 의지합니다."
오늘 아침 글이 아닌 다른 <묵상>에서, 이 글을 소개한 배철현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발적으로 조용하고 효율적으로 시도하고 완수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일, 운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결정에 좌우되는 불안한 일을 추구한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어리석은 선택을 한 자신을 탓하지 않고, 남을 탓한다." 어제는 실제 내가 할 수 없는 일인데, 소외 받았다는 마음을 혼자 먹고 기분 나빠 했다. 그럴 필요 없다. 네 일상을, 내 임무를 묵묵하게 수행할 뿐이다. 평온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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