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9.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2월 15일 : <다산의 마지막 습관>
지난 달부터, 나는 조윤제라는 분이 지은 <다산의 마지막 습관>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페이스북의 담벼락 광고에 낚인 것이었다. 요즈음은 페북에 돈을 내면 광고를 할 수 있다. 우선 광고의 제목에 눈길이 갔다. "절망에 빠진 다산 정약용이 매일 아침마다 한 행동"이었다. 나도 3년전 부터 일상을 지배해야 사람이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습관을 길들이고 있다. 특히 다른 이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삶을 내 수고로 살아가는 것과 좋은 습관으로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일에 신경을 써오고 있다. 그러던 차에 유배 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은 어떻게 그 절망을 극복했는가 알고 싶었다.
33장의 카드 광고인데, 멋진 사진과 인상적인 짧은 문장 멘트로 구성되어 있다. "살아내는 한, 사람은 벽에 부딪히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사는 동안이 아니라, '살아내는 동안'이라는 말에 눈길이 갔다. 그렇다. 살아내야 한다.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보며, 나를 되돌아 보게 된다.
공지영 작가로 부터 얻은 생각으로, 나는 지난 주부터 지금-여기 그리고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는 길을 걷자고 다짐했다. 특히 나 자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다루자고 다짐했다. 그래야 존재가 풍성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 마디로 자신을 섬기는 일이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 그러했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 헤르만 헤세가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일이다. 최진석 교수는 <책 읽고 건너가기>의 한 토크쇼에서 " 자기를 만나게 해주는 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책 읽기, 글 쓰기, 운동 그리고 여행이라 했다. 동의한다. 거기에 나는 한 가지를 덧 붙이고 싶다. 떠 한가지 더 자기 자신을 쉽게 만나는 때가 실패하여 절망에 빠지거나 벽에 부딪쳤을 때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다산 정약용은 나이 마흔에 형제들을 잃고 유배를 떠나며 지옥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60세에 이르러 다시 마주한 막막한 삶에 다산은 또 흔들렸다고 한다. 공자는 마흔을 미혹(迷惑)의 시기라 하며, 흔들이지 않는 나이라고 했지만, 다산은 매순간 휘둘렸다고 고백하였다. 나이 60을 공자는 이순(耳順)이라 했다. 타인에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나이라지만, 다산은 자신의 안에 타인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불안했던 다산은 60을 넘어서면서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고,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었다고 한다. 일상을 우선 회복하자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귀찮음을 이기고, 안고 있는 절절한 고민들을 뒤로 한 채 매일 마당을 쓸었다고 한다. 하루의 시작부터 스스로를 이견 낸다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이겼다면 두 번째에서도 이길 것이고, 그렇게 이겨낸 경험이 쌓여 승리하는 습관이 된다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마음이 약해질 때면, 오래 전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다음 내용을 늘 기억했다고 한다. 그가 매일 읽었던 책은 놀랍게도 <소학>이었다. 이 책은 수신(修身)의 공부이다. 수신이란 심신을 닦는 일이다. 다산은 귀양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운명에 지지 않기 위해 매일 이기는 습관을 들이는 수신을 실천했다. 다산은 공부와 저술에 힘쓰느라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이나 났다고 한다. 억울함과 어려움을 뒤로 한 채 쌓여간 이러한 노력들은 '다산학'이라는 큰 이름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진다.
보통 우리는 큰 시련과 변화를 마주치게 될 때 상상도 하지 못할 큰 결단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산은 일상을 지배하며 그 일상을 지키고자 하는 사소한 노력들을 했다. 인생에서 큰 변화가 찾아 왔을 떼 먼 데서만 답을 찾는 사람은 그 고난을 이겨 내기 힘들다. 그건 사소한 일상들부터 이기는 것을 습관을 삼아야 한다. 다산 정양용처럼. 내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이었다고 한다.
- 오늘 고치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하지 말라.
- 누구나 지옥을 걷고 있으니 타인에게 관대하라.
- 가장 빠른 지름길은 지름길을 찾지 않는 것이다.
- 느리기에 방향이 확실하고 무겁기에 발자국이 깊다.
- 영웅은 무수한 평범함과 실패에서 비롯된다.
또다시 이 출판사는 페이스북에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습관을 예로 들며 광고를 했다. 미셸 오바마에게는 자신만의 동굴이 있었다고 한다. 그 동굴은 책들로 뒤덮인 작은 방이었는데, 그는 거기에 자주 들어갔다고 한다. 그에게 그 좁은 곳이 하늘로 향하는 창구였다 한다. 그는 그곳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충전이 되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다.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자신만의 동굴이 필요하다. 그래 나는 <세심실(洗心室, 마음을 닦는 곳)>이라는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버락 오바마도 종종 혼자만의 공간에 들어가 어제를 조용히 돌아보며 '조각모음'을 했고 그럼으로써 내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한다. 그것이 강한 압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다스리며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힘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요즈음 점차 파편화되면서,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 익숙해져야 하는 '혼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데 힘들어 한다. 다산 정약용도, 오바마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다산은 새벽마다 마당을 쓸었다 한다. 밤새 묵은 미련과 어리석음을 먼지와 함께 쓸어 날려보냈다 한다. 그에게 새벽은 고요함 속에서 혼자를 오롯이 내버려둘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나도 그렇다. 다시 잠자리에 드는 한 있어도, 새벽에 눈을 뜨면 책을 보거나 글을 쓴다. 다산은 마당 청소를 마친 다음, 홀로 작은 방에 앉아 고요히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한다.
다산 정약용의 이러한 과정은 스스로를 반추하며 반성하고 또 그렇게 모자란 자신과 조금씩 화해하는 과정을 가졌다고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끌어 안았던 것이다. 자기를 섬기며, 자신의 행해 부단히 걸어가는 일을 한 것이다. 그렇게 새벽마다 혼자 있는 습관은 앞날을 시약할 수 없는 귀양살이를 버티고 다산학을 완성시킨 힘이 되었던 같다.
앞이 그저 아득하기만 한 인생이라는 길을 걸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기술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삼지이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뒤를 돌아볼 수 있다면 쉽게 휘둘리지 않게 되고, 설령 흔들릴지 언정 두렵지 않게 된다. "사람은 되돌아볼 때마다 어른이 된다."(<소학>) 이 광고를 읽고, 이번 연휴 기간 동안 <다산의 마지막 습관>을 정리하며 읽어 볼 생각이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시를 한 편 읽은 후에, 지난 주에 읽은 글 중에 인상적이었던, 이어령 교수님의 인터뷰 내용을 공유한다. 오늘 아침 시는 우리를 깜짝 깨운다. 다산을 귀양살이 시키는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 없다. 이 시를 소개한 [먼. 산. 바. 라. 기.]님은 이렇게 덧붙임 글을 썼다. " 예수 말씀의 혁명성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드물다. 휘황찬란한 대도시의 교회나 성당에 예수의 정신이 살아 있을까? 차라리 예수를 찾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혐오하는 구석진 곳이나 어두운 곳을 찾아가야 할지 모른다. 당신들이 손가락질하는 그곳의 그이가 우리 시대의 예수인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 산상수훈/고정희
내 뒤를 따르고 싶거든
남의 발을 씻겨주라
씻겨주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기 자랑 시대,
남의 발 씻기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몸종이라 부르네
내 십자가를 지고 싶거든
원수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남북분단 시대,
그대를 세상은 빨갱이라 부르네
내 기적을 알고 싶거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내밀고
오 리를 가라 하면 십 리까지 따라가라
따라가라, 예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먹이사슬의 시대,
몸을 달라 하면 쓸개까지 주는 이 따로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창녀라 부르네
내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땅에서 가난하라, 땅 위에
재물을 쌓지 마라, 주님 말씀하셨네
그러나 우리 사는 시대는 자본독점 시대,
오직 가난한 이 여기 있으니
그대를 세상은 거지라 부르네
아아 주님 당신은 위대한 허풍쟁이
대책 없는 허풍쟁이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구하면 주실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말씀하셨건만
구하고 두드리는 이 반동이라고 부르네
아니오 하는 이 반체제라 부르네
이어령 교수님은, 코로나-19의 1년을 되돌아 보시면서, 다음과 같은 "4 가지 '코로나의 역설'"을 말씀 하셨다. 그 외 이 교수님의 여러 말씀은 나에게 시국을 보는 좋은 잣대가 되었다.
(1) 글로벌의 역설: 전 세계가 촘촘하게 이어졌고 누구나 어디로든 갈 수 있게 되면서, 코로나-19가 비행기의 속도로 펴졌다. 하나의 질병이 동시에 전 세계에서 발병한 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다. 그 결과 봉쇄가, 로컬화가 시작되었다.
노자가 말하는 소국과민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노자의 꿈은 "크기는 작고, 백성은 적은 국가였다(小國寡民)." 그래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내 마을이 좋다. 그리고 "문명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굳이 쓸 필요는 없고(使有什伯之器而不用), 백성들이 죽음을 소중히 여겨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이리저리 옮길 필요가 없는 곳이다(使民重死而不遠徒)." 그리고 "배도 있고 수레도 있으나 탈 일이 별로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지만 싸움이 없는 곳, 지식이 권위와 권력으로 작용하지 않는 곳(雖有舟與,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이다." 자동차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기계들을 쓰지 않고, 텃밭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삶과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나를 강제로 이주하게 하지 않는 곳에서, 노자의 생각처럼 나는 살고 싶다.
'소국과민(小國寡民)', '나라를 적게 하고 주민의 수를 적게 한다'는 말이다. 초 연결이니, 글로벌이니 하면서 너무 키우고 채운 결과, 좋은 점도 있지만, 요즈음 같은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좋은' 대책이 없다. 그 '잘난 척"하는 구글은 뭐 하는가? 네이버는 뭐 하는가? 바이러스 앞에서. 노자 『도덕경』 마지막 장인 제 80장을 한문 없이 내 방식대로 번역하여 본다.
"나라를 작게 하고, 주민의 수를 적게 한다.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잘 갖추지만, 굳이 쓸 일이 없게 삶을 경영한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되게 한다. (…) 자기가 먹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달고, 맛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입은 옷이 가장 아름다우며, 자기가 사는 집이 제일 편안하고, 자기가 누리는 문화를 가장 즐겁게 여기는 삶을 산다. 이웃 나라는 서로 바라볼 수 있고 서로 닭 우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에 있지만, 주민들이 죽을 때까지 왕래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
내 생각으로도 '소국과민'이 돈과 무기의 힘을 내세워 이윤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으로 힘의 독점을 줄어들게 하는 길이라 본다.
(2) 선진화의 역설: 자유의 가치, 인권의 가치가 높은 나라일수록 피해가 컸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자유나 인권을 제한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우리가 희구 하는 것은 자유와 인권인데, 글로벌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을 추구하면 곤란해지는 세상이 됐다.
(3) 호저의 역설: 호저는 고슴도치처럼 몸에 뾰족한 가시가 있다. 추우면 짐승들은 함께 모여 온기를 나누는데, 호저는 찔리니까 서로 가까이하지 못한다. 혼자는 춥고, 모이면 아프고,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있고 싶어 하지만, 외로우니까 같이 있고 싶어 한다. 그런데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보편화도면서 억지로 혼자 있게 된 사람은 더욱 외로워지고, 억지로 같이 있게 된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문제는 '억지로' 이다. 자발성이 필요하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은 독립하지 못해 혼자일 때 힘든 것이라면, 고독은 자발적으로 고고하게 혼자 서서 독립하였을 때 느끼는 희열이다. 스스로 고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우울증이 심해지는 코로나 블루, 화병이 생기는 코로나 레드로 인해 가정 불화와 이혼도 늘고 있다.
(4) 디지털의 역설: 디지털 만능으로 알던 사람들은, '아 디지털만 있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라인 수업만 하면서, 학교에 못 가게 되니 오히려 선생님의 지도, 친구들과 만남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디지털은 접속하는 것이고, 아날로그는 접촉하는 것이다. 이 둘이 같이 가야 한다. 이게 이어령 교수님이 말한 '디지로그'이다.
이 네 가지 역설을 통해 깨달어야 할 것은 생명의 가치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일상은 러시안룰렛이 되었다. TV 속보를 통해 죽음을 매일 매일 실감하는 가운데, '오늘은 안 걸렸구나' 하고 안도한다. 앞만 보고 달려오던 삶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나에게 소중한 생명의 원천적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싶을 때 갔는데, 그런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도 알게 됐다. 자유와 생명은 같은 뜻이다. 자유를 잃으면 다 잃은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가치는 곧 자유의 가치이다.
경주에서도 코너워크 할 때 순위가 바뀌는 것처럼, 포스트 코로나에서 승자와 패자가 갈릴 것이다. 우리는 산업화, 정보화로 이어지는 직진 코스를 달렸다. 그러다가 코로나라는 코너를 우리 모두 돌고 있는 중이다. 이 코너를 돌고 나면 생명화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생명이 가장 중요한 테제가 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앞으로 반 생명적인 것들은 절대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생명은 서로 같이 사는 것이다. 상생하고 공생하고 공존하는 거다. 인간은 동굴에 살 때부터 박쥐와 같이 살았다. 같이 산다는 말이 중요하다. 코로나를 보니 어느 누가 뚫리면 우리 모두 다 무방비 상태가 된다. 나만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같이 살아야 바이러스의 공격을 당하지 않는다.
마스크가 중요하다. 내가 걸리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남에게 옮기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한 마스크가 같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피해를 볼 수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둘러보면, 누군가에게 갑인 사람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을이 된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 살고 너 죽자(이기주의)'나 '나 죽고 너 살자(이타주의)', '나 죽고 너 죽자(물귀신)'가 아니라, '나 살고 너 살자(상호주의)'만이 코로나 시국을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이다. 인류는 포식에서 기생, 기생에서 상생의 자리 이타행의 단계로 발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마스크를, 개인 위생을 철저히 하며 방역을 하는가? 벌금이 무서워가 아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고,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게 유교적 가치를 지닌 공동체 정신이다. 이 가치가 가득한 k-방역이 성공한 이유이다. 우리는 남을 위해 눈물 한 방울을 가졌다. 우리는 이 상생의 원리를 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피니시를 잘 못한다. 매 순간 마침표를 찍어야 새 삶이 가능하다. 인생은 물음표가 씨앗이고, 느낌표가 꽃이다. 우리는 철학의 세기가 없었다. 여기서 철학이란 신에 대한 믿음으로 부터 벗어나 인간 스스로 생각하며 혼자 서기를 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 철학의 세기를 일본으로부터 전해온 대로 '계몽의 세기'라 한다. 우리는 이 경험이 없다. 즉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힘이 모자란다. 게다가 지속력이 떨어진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 남의 생각에 휘둘리기 쉽다.
'나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밖에 없는 내 생각을 내 머리로 풀어내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그것들이 합쳐져 창조적인 집단 지성이 생겨난다." (이어령) 누구나 온리원(only one)이다. 산다는 것은 돈, 명예, 권력을 얻으려고 앞만 보고 달려 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희열을 맛보며 행복하게 하루 하루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일을 위해 약속한 것들을 행하다가 죽는 거다. 산다는 것은 늘 어떤 약속을 지키는 것의 연속이다. 그런 식으로 주어지는 새 아침을 맞이하며 살다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약속들인 그 일들을 하다가, 죽는 거다. 그러니 특별한 삶, 특이한 죽음 같은 건 없다.
이어령 교수님이 생각하는 삶이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거다.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그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호기심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왜 그런지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때 느끼는 순간의 희열이 행복한 삶을 만들어 준다. 그러다가 죽는 거다. 그래 나는 매일 공부하고, 몰랐던 것을 알아가는 그 희열의 맛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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