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5.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2월 11일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우리는 이날을 '까치 설'이라 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라는 동요가 있기 전에는 '까치 설'이 없었다 한다. 옛날에는 '작은설'을 가리켜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했다 한다. '아치'는 '작은(小)'의 뜻이 있는데, '아치설'의 '아치'의 뜻이 상실하면서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엉뚱하게 바뀌었다는 주장이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이 날, 우리들에게 설빔으로 새 옷을 사 주셨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그런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올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까운 사람들끼리 만나지도 못하게 한다.
내일은 정월 초하루 설날이다. 그래 4일간 연휴인데,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며 격리된 일상을 해야 한다. 그래도 설날은 명절이다. 다행이도, 나는 딸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평소에 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나름 즐기고 있다. 어제는 깻잎 전에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을 즐겼다. 대단한 궁합이었다.
설날은 '낯설다.‘의 설에서 유래한 처음 맞이하는 ‘낯 설은 날’이라고 하는 뜻과 ‘서럽다’는 뜻의 ‘섧다’에서 '늙어감이 서럽다'는 뜻이 있다 한다. 또 다른 유래는 '삼가다'라는 뜻을 지닌 '사리다'의 '살'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다. 각종 세시풍속 책에는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고 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조신하게 하여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이라 한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조용하게 연휴를 보낼 생각이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공지영의 책 제3부, "나는 기필코 해답을 찾아야 했다"로 넘어간다. 대학에서의 밥벌이를 그만두고, 나는, 공지영처럼, "나는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나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 그런 고민들을 공지영의 산문집에서 만났고, 책을 두 번째 읽고 있는 중이다. 여러 가지의 의견이 나와 너무 같아서 이다.
현재 우리들의 모습에는 우리의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늙어감은 공평하다. 젊은 시절 아름다움을 구가하면 할수록 그들의 노쇠는 더 두드러지고, 인간의 내면이 밖으로 배어 나온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얼굴은 성형이 아니라 내면이 결정한다. 그 내면이 밖으로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그건 오랜 시간 걸리는 일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노년을 맞고 싶다면 내면을 가꾸어야 한다. 어쨌든 50이 넘은 후의 사람은 진심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새해에는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하고 싶다. 그리고 <장자>의 "덕충부"에 나오는 애태타처럼 살고 싶다. 두 가지이다. 하는 "나서서 주창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동조할 생각이다. '나'라는 자의식에서 풀려나고 싶다. 마치 물처럼 말이다. "빈 배"처럼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갈" 생각이다. 두 번째는 "양행(兩行)하는 사람, 양쪽을 한꺼번에 보는 사람"으로 여유롭게 살고 싶다.
신년 기원/이성부
시인들이 노래했던
그 어느 아름다운 새해보다도
올해는
움츠린 사람들의 한해가
더욱 아름답도록 하소서
차지한 자와 영화와
그 모든 빛나는 사람들의 메시지보다도
올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소망이
더욱 열매 맺도록 하소서
세계의 모든 강력한 사람들보다도
쇠붙이보다도
올해는
바위틈에 솟는 풀 한 포기,
나목을 흔드는 바람 한 점,
새 한 마리,
억울하게 사라져 가는 한사람,
또 한사람,
이런 하잘것없는 얼굴들에게
터져 넘치는 힘을 갖추도록 하소서
죽음을 태어남으로,
속박을 해방으로,
단절을 가슴 뜨거운 만남으로
고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모든 우리들의 한해가 되도록 하소서
역사 속에 그리움 속에
한 점 진하디 진한 언어를 찍는
한해가 되도록 하소서
인간 관계에서 중요한 결정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해야 한다. 쫓기는 사람은 악마의 입 속에라도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둘을 구별하고 나면 인생은 엄청 달라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을 살피고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 외에는 없다.
헤겔은 "이세상에서 존재하는 단 하나의 영원한 진리는,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시를 썼다. "꽃은 모두 열매가 되려 하고/아침은 모두 저녁이 되려 한다/이 지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변화와 세월의 흐름이 있을 뿐". 그러니 사라져가고 변화하는 것은 축복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한 번 상상해 봐라.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건 엄청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과 내 욕망의 범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스톱(stop)"의 마법을 걸고 싶어 한다. 그걸 알면서도, 십년 전의 내가 상상하던 내가 전혀 아닌 것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도, 우리는 오늘도 부질없이 10년 후의 계획을 세운다. 그러니 막 살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가변성, 인간의 유약함, 이 모든 것을 겸손히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고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영영 행복은 없는 거다. 나는 외롭든,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나를 괴롭히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하고 싶다. 내가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그 사람이 나일 수는 없다. 그 사람의 사생활을 지켜주어야 한다. 특히 비밀번호 알아내서 휴대폰 뒤지고 그러면 안 된다. 그건 그 사람이 화장실 있을 때 잠가 놓은 문을 따고 들어가는 것보다 더한 거다. 그게 친밀감은 아니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이 통하는 아름다운 거리가 없으면 두 사람은 이내 똑같이 시들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가끔 자신의 문제를 진심으로 해결하고 싶어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자기 밥그릇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은 한 인간으로서 결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세상에는 노력해서 되지 않는 것도 있다. 이 '진실한 아픔'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불행은 그저 받아들이느냐, 시간을 끌고 만신창이가 되어서야 받아들이느냐 하는 선택을 강요한다. 그때 우리는 맨몸으로 그 '진실한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은 채 생의 한 모퉁이를 돌아야 한다.
나도, 공지영 작가처럼, 다음과 같이 똑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그건 진짜이다. 이런 '진실한 아픔'의 고통이 없었다면, 허영기 가득하고 가장 속물이면서 거짓 지식으로 그것을 위장하고 마음 속으로는 다른 고통 받는 이들을 멸시하는 가장 불쌍한 족속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공지영 작가처럼, 내 인생의 고통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공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고통의 축복'이다. 고통만이 인간을 성장하게 한다. 고통은 싫다고 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청한다고 일부러 오는 것도 아니다. 가끔 고통을 피하는 척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자기기만이다. 고통의 정직한 응시 혹은 직면만이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언덕 길을 오를 연습을 하게 한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감회가 남 다르다.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더 많이 보인다. 그건 그만큼 생각의 여유를 주고 여유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최진석 교수는 시선의 높이라는 말로 자주 설명한다. 시선의 높이가 삶이 높이라고.
공지영 작가는, 이제 고통이 오면, "뭐 왔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지나게 주게.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끝나면 뭔 가가 오긴 오겠군. 그러니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기다리며 기쁘게 이걸 맞이해보자"고 한다. 이런 식으로 정직하게 맞이한 고통이 내게 실망을 준 적은 없다고 한다. 언제나 문제는 자기 속임수, 가지 기만일 것이라 했다. '자기기만(自己欺瞞)'은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이다. 양심에서 벗어나는 일을 무의식 중에 행하거나 의식하면서 강행하는 경우이다.
이 분야의 책으로는 로버트 트리버스의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이한음 역, 살림, 2013)라는 책이 있다. 그는 진화생물학자의 눈으로 속임수(欺瞞)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이 책에서 잘 분석하고 있다. 타인을 속이거나, 또는 자신을 속이는 우리들은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고 이용당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자기기만'은 내가 나를 속이는 거다. 우리 안에 의식과 무의식이 있다고 치면, 의식이 모르도록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편집하는 거다. 그러면 진실한 정보는 무의식에 저장되고, 의식에는 거짓이 남는다. 같은 사건을 접해도 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를 선택해서 기억한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산의 마지막 습관 (0) | 2021.02.22 |
---|---|
사랑은 강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0) | 2021.02.22 |
관계의 다이어트 (0) | 2021.02.22 |
이야기의 힘 (0) | 2021.02.22 |
친절은 불편 감수 (0) | 2021.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