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색깔을 사랑해야 할 가을 저녁에 우리는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하는 문학 이야기를 했다. 젊은 소설 쓰는 사람 김연수가 우리 동네에 온 것이다. 주제는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이였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란 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숱하게 존재하고, 모순 덩어리라는 더러운 사실을 퍼트림으로써 이 비정한 세계의 가혹한 현실을 폭로하고 '선의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문학은 소위 '쓸데 없음'이 마련해준 자유를 통해 실용주의에 매인 욕망에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그 실용성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고 본다. 문학비평가 김현도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문학의 효율성은 그 쓸모를 거부하는 데서 얻는 자유와 해방의 귀중함에 있음을 말하였다.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습니다." (김현)
소설 쓰는 김연수는 문학을 써먹으려면, "그렇지만"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 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설명할 다른 문장을 찾으라고 했다. 판단의 문장에서 관찰의 문장으로, 생각의 문장에서 감각의 문장으로, 결론의 문장에서 원인으로 문장을 찾으며, 뭔가 좋은 생각을 하라고 했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산다. 처음에는 그냥 닥치는 대로 살고, 그 다음에 결말에 맞춰서 두 번의 플롯 포인트를 찾아내 이야기를 3막 구조로 재배치하는 식으로 한 번 더 산다. 나는 소설 쓰는 일에서 삶의 지혜를 배웠다. 젊은 시절 대충 살았다면, 죽음을 앞당겨 결말을 성찰하고, 그 결말에 맞춰 다시 제2의 인생을 살면 된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소설을 다시 쓰듯이, 삶의 이야기도 다시 쓰면 된다. 이런 생각에 어제 가을 밤은 따뜻했다. 와인도 목을 잘 타고 넘어갔다. 함께 『장자』를 읽은 우당, 우경 그리고 나(지난 일요일 순천에서 우리는 '우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지었다. 그래 나는 '우표'가 되었다)는 따로 남아 와인 한 병을 더 마셨다.
오늘 사진은 강의를 마치고 식당 가는 길에 하늘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가을 바람이 '없는 물감'으로 나무 캔버스에 색칠하느라 분주했다. 걸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종종 땀보다 돈을 먼저 가지려 하고, 설렘보다 희열을 먼저 맛보려 하며, 베이스캠프보다 정상을 먼저 정복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노력보다 결과를 먼저 기대하기 때문에 탐욕스러워지며 조바심 내고, 빨리 좌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리 울었나 보다"라고 했다. 꽃 한 송이를 피워내는 데도 계절의 변화와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세상만사 모든 일에 '순리'를 따르면 삶의 가치가 더욱 밝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단풍은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한 물을 비우면서 아름다워진다. 비우면 더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이 가을에 배운다. 오늘도 나는 비우기를 할 생각이다.
단풍은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 것이 아니라, 초록의 생명이 마지막 열정으로 뿜어낸 절정의 환희일 것이다. 노년도 저 금빛의 풀밭과 단풍 든 나무들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러니 늙는 것을 서러워 말 일이다. 오늘도 이 가을을 즐기며, "가을의 어록"를 받아 적으리라. "작은 씨앗 하나에 든 가을 문장을 읽다가/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다"니까.
가을 어록/이기철
백 리 밖의 원경이 걸어와 근경이 되는
가을은 색깔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이 풍경을 기록하느라 바람은 서사를 짜고
사람은 그 서사를 무문자로 읽는다
열매들은 햇살이 남긴 지상의 기록이다
작은 씨앗 하나에 든 가을 문장을 읽다가
일생을 보낸 사람도 있다
낙과들도 한 번은 지상을 물들였기에
과일을 따는 손들은 가을의 체온을 느낀다
예감에 젖은 사람들이 햇살의 방명록에 서명을 마치면
익은 것들의 육체가 고요하고 견고해진다
결실은 열매들에겐 백 년 전의 의상을 꺼내 입는 일
그런 때 씨앗의 무언은
겨울을 함께 지낼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내 시는 씨앗의 침묵을 기록하는 일
바람이 못다 그린 그림을
없는 물감으로 채색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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