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1년 4월 27일)

어제에 이어 '쓸모없음의 쓸모'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 이야기는 '쓸모 없음' 그 자체가 궁극 목표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일단 쓸모 없음으로 자기를 보전하여 더 큰 쓸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무용(無用)하지만 그게 결국 유용(有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쓸모 없는' 것의 '쓰임') 하면, 사람들은 <장자> 의 제4편 "인간세" 28-32장을 제일 많이 인용한다. "석이라는 목수가 제나라 곡원이라는 곳에 이르러 토지신으로 모신 사당의 상수리나무를 보았다. 나무의 크기는 소 수천 마리를 갈릴 만했고, 둥치는 백 아름, 높이는 산을 굽어볼 정도였다. 맨 아래가지가 바닥에서 열 길쯤 올라가 벋었는데, 거기에는 작은 배를 만들 수 있는 가지만 해도 여남은 개가 되었다. 구경꾼들이 모여 장터를 이루었는데 목수 석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 버렸다. 제자가 석에게 물었다. "제가 그 동안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녔지만 제목감으로 이처럼 훌륭한 나무를 아직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눈 여겨 보시지도 않고 지나치시니 어떤 일이십니까?" "됐네.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을 말게. 쓸모가 없는 나무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짜면 곧 썩고, 그릇을 만들면 쉬 부서지고, 문을 짜면 수액이 흐르고, 기둥을 만들어 세우면 좀이 슬 것이니, 재목이 못된다. 아무 짝에도 못쓰지. 그러니까 저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 거야."
이 장석 이야기도 어제 말한 제1편 "소요유"(1:14)에서 혜자와 장가가 '가죽나무'를 놓고 이야기한 '쓸모 없음'의 큰 쓸모(無用之大用)'와 근본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구태여 다른 점이 있다면, 어제 말한 제1편에서는 장자의 가르침이 얼른 보기에는 쓸모 없는 것 같지만 보통의 쓸모를 훨씬 넘어서는 쓸모가 있음을 이야기한 데 비하여, 여기서는 재능이 있다는 인물이 함부로 그 '쓸모'를 발휘하려고 하다가는 결코 정말 쓸모가 있기 전에 "하늘이 준 나이를 다 못 살고 도중에서 죽는 법"이니 이런 식으로 재앙을 자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30장은 다음과 같다. "목수 석이 집으로 돌아오자, 사당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그대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 하려는 가? 저 좋다는 나무들에다 비교하는가? 아가위나무, 참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따위에 비교 하려는 가? 열매가 익으면 뜯기고 욕을 당한다.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기고, 그런 나무들은 자기들의 재능 때문에 삶이 비정하다. 하늘이 준 나이를 다 못 살고 도중에서 죽는 법이다. 스스로 세상살이에서 희생을 자초한 셈이다. 모든 것이 다 와 같은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쓸모 없기를 바랐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완전히 그리 되었으나,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일세.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클 수 있었겠는가? 또, 그대나 나나 한낱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대는 상대만을 하찮다고 한단 말인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가까운 쓸모 없는 인간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 운운한단 말인가?"
재능이 있다는 인물이 함부로 그 '쓸모'를 발휘하려고 하다가 결코 정말 쓸모가 있기 전에 "하늘이 준 나이를 다 못 살고 도중에서 죽는 법"이니 이런 식으로 재앙을 자초하지 말라는 것과 동시에 남을 쓸모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존재론적 이유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사당나무가 장석에게 꿈 속에 한 말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이다.
(1) 자기는 지금껏 쓸모 없기를 바라다가 이제야 장석 같은 목수가 쓸모 없다고 판정했으므로 마음을 푹 놓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쓸모 없음이 얼마나 쓸모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고,
(2) 나무도 장석도 모두 대자연에 속한 한낱 물체로 서로 보완의 관계를 맺고 있고, 도(道)의 기준으로 보면 결국 하나인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를 쓸모라는 기준으로 판단하여 배제하느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장석이 사당나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라고 여겨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장석은 그 나무를 오로지 목수의 판단 기준인 재목의 가지로만 따졌는데 꿈에 사당나무가 나타나서 장석의 단견과 일방적인 생각을 지적했던 것이다. 오강남은 해제에서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를 인용하다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 "마틴 부버의 요어를 빌리자면, 사물을 '나와 너'로 보는 것도 시원치 않은데, 당신은 사물을 '나와 그것'으로 보고 그것을 당신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것"(<장자>, 현암사)이다. 나와 너의 일인칭과 이인칭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일인칭과 삼인칭 관계로 본다는 말이다. 장석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본다면, 장석이야말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그러니 사물을 대할 때 함부로 쓸데 있다 없다를 속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장석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석이 깨어나 그 꿈 이야기를 하자 제자가 물었다. 그것이 그렇게 쓸모 없기를 바랐다면, 왜 사당나무 노릇은 하는 건가요? 쉬! 조용하게. 자 나무는 그냥 사당에 의지할 뿐이다. 사람들은 그 진의를 알지 못하고 욕을 하고 있다. 설령 사당나무가 되지 않았더라도 잘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 나무가 자기를 보전하는 방법은 우리 사람들과 다르다. 보통의 판단 기준으로 그것을 떠받든다 거나 한다면, 원가 빗나간 것 아니겠는가?"
장석의 제자가 그 나무가 쓸모 없기를 그렇게 원한다면 철저하게 쓸모가 없을 것이지 사당 나무 노릇을 왜 하느냐고 따지자, 장석이 사냥 나무를 대변하여 이렇게 대변한다. "쓸모 없음" 자체가 궁극 목표가 아니라, 일단 쓸모 없음으로 자기를 보전하여 더 큰 쓸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나무를 보고 왜 사당나무가 되었냐고 비난하거나 또 그것이 사당 나무라고 떠 받드는 것은 사당 나무 본래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간의 평가 기준으로만 따지는 빗나간 판단이라는 것이다.
사당나무의 더욱 큰 쓸모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그리고 다음 시를 공유한다. "넉넉한 쓸쓸함"이라는 제목으로 따스해 지는 시다. 그러나 "넉넉한 쓸쓸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고개와 힘든 길을 걸어야 했겠는가? 삶은 꽃 길이 아니다. 삶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다. 그 고독과 치열함이 우리를 위무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쓸모 있고, 없고를 떠나 허심, 무심의 경지, 집착이 없이 자유로운 경지, 자유자재한 경지를 꿈꾼다.
이 넉넉한 쓸쓸함/이병률
우리가 살아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와 다를 테니
그때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만나자
무심함을
단순함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만나자
저녁 빛이 마음의 내벽
사방에 펼쳐지는 사이
가득 도착할 것을 기다리자
과연 우리는 점 하나로 온 것이 맞는지
그러면 산 것인지 버틴 것인지
그 의문마저 쓸쓸해 문득 멈추는 일이 많았으니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내지 않으면 안 되게 살자
닳고 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발이 발을 뒤틀어버리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것으로 살자
밤새도록 몸에서 운이 다 빠져나가도록
자는 일에 육체를 잠시 맡겨두더라도
우리 매일 꽃이 필 때처럼 호된 아침을 맞자
<장자>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장석 이야기"에 이어 "거목(巨木)과 신인(神人) 이야기가 이어진다. "남백자기가 상구에 놀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나무를 보았는데,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천 대를 매어 두어도 나무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남백자기가 말했다. '이 어찌된 나무인가? 반드시 특별한 재목이겠군.' 그러나 위로 가지를 올려다보니 모두 꾸불꾸불하여 마룻대나 들보감도 아니었고, 아래로 큰 둥치를 보니 속이 뚫리고 갈라져 널 감도 아니었다. 잎을 핥으면 입이 부르터 상처가 나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흘 동안 취해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과연 재목이 못 될 나무로구나, 그러니 이렇게 크게 자랐지. 아, 신인(신인)도 이처럼 재목감이 못되는 것을."
이 문장은 '쓸모 없음'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쓸모가 결국 '신인(神人)'의 경지임을 함의(含意)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인은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유용성의 기준으로 따져 보면 가장 쓸모 없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깨달은 이의 눈으로 볼 때, 더할 수 없이 큰 쓸모를 지닌 사람이다.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런 '함이 없는 함'을 통해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위(無爲)의 사람들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쓸모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장자>의 제1편 "소요유"에 나온 [막]고야산의 신인들처럼 가만히 있으면서도 요임금을 움직였던 사람들(1:9-11)이다. 이런 사람이 망치질을 못 한다거나 이해 타산에 서툴다거나 약삭빠르지 못하다고 해서 한심한 사람들이 아니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십시오"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 처럼, 자질구레한 일에 쓰이기보다 도에 의해 쓰일 때 사람에게 더욱 참된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
장자는 세속에의 집착이나 얽매임에서 벗어나야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그가 유가를 배척하고, 초 위왕의 재상 초빙을 사절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또한 그는 사회참여에 열을 올리던 인재들이 그 재주 때문에 제거되는 사례를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산목(散木: 쓸모 없는 나무)의 우화를 통해 쓸모 없는 것의 유리함을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무용(無用)에서 도리어 유용함을 얻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는 난세에서 터득한 그 다운 처세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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