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좀 긴 글이지만, 번잡스러움을 피하고 고독하게 천천히 읽으면, 위로가 된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비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떤 때에는 비를 기다린다. 비는 그 철을 돕거나 재촉하는 촉매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봄비에 만물이 더 잘 보일 것이다. 일기 예보를 보고, 지난 금요일에 심은 고구마가 안타까워 조마조마 했는데, 어제 오후부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필요한 만큼 봄비가 내렸다. 그래 나는 별 일정 없이 하루 종일 혼자 지냈다. 시인들은 봄비를 좋아하는가 보다. 시의 제목이 '봄비'인 시가 수두룩하다. 이수복 시인의 <봄비>(2019, 3월 12일)와 변영로 시인의 <봄비>(2019년 4월 24일)를 나는 좋아한다. 우리는 이미 공유한 적이 있다. 오늘 아침은 김용택 시인의 것을 공유한다. 사진은 비를 맞으며 동네에서 찍은 것이다.

일감이 줄어들거나 재택 근무 기간이 길어지면서 집안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이 길어져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드니 쉽게 무기력해지고 고립감을 느끼는 '코로나 블루(코로나 우울증)'가, 원래 '낙관주의자'인 나에게도 찾아왔다. 어제는 봄비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유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 좋은 소식 두 개를 얻고 즐거웠다.

하나는 페이스북에서 <쓰레기통 격리 외출(Bin Isolation Outing)>이라는 이름의 계정을 만난 것이다. 여러 포스팅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웃음은 수많은 연구를 통해 통증과 염증 수치를 경감시키고 근육의 긴장을 완화시킨다고 확인된 특효약이다. 그런 면에서 바이러스 전염에 대한 우려만 키우면서 우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작은 즐거움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다른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행위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페이스북 찾기에 Bin Isolation Outing을 입력하면 보거나 가입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어제가 24 절기상 곡우(穀雨)였는데,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곡우는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있으며, 봄의 마지막 절기에 해당한다. 곡우의 ‘곡(穀)’은 곡식을 뜻하며 ‘우(雨)’는 비를 말한다. 두 단어가 합쳐져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상들은 곡우를 한 해 농사를 책임질 비가 내리는 중요한 시기로 여겼다. 그래서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다양한 속담들이 전해 지고 있다. 곡우 때는 농사 뿐 아니라 조기잡이도 활발해진다. 이 시기에 잡은 조기는 조기 중 으뜸으로 '곡우사리'라고 부른다. 농사를 중시했던 과거에는 벼를 파종하는 곡우 시기에 죄인도 잡아가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등 중요한 절기였다. 그래 어제 오후 내내 비가 왔지만, 자연에게 감사 하며 위로를 받았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봄비 1/김용택

바람이 붑니다
가는 빗줄기들이
옥색 실처럼 날려오고
나무들이 춤을 춥니다

그대에게 갈까요
말까요
내 맘은 절반이지만
날아 온 가랑비에 내 손은 젖고
내 맘도 벌써
다 젖었답니다

좀 긴 글이지만, 번잡스러움을 피하고 고독하게 천천히 읽으면, 위로가 된다. 나도 그랬다. 몇일 전부터 이어지고 있는 질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은 지난 토요일에 이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독립적 주체가 되려면,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사람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기본이다."(최진석) 그리고 다음 문장들도 최진석 교수가 쓴 글에서 만나 가져온 것들이다. 누구나 기본만 갖추고 있으면, 세속적인 일에서나 영적인 일에서나 모든 일을 잘 이룰 수 있다.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기본 가운데 기본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 질문은 독립적 주체로 성장하려는 문을 연다는 말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옆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이어져야 한다.
-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 내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인 이유는 무엇인가?

고독한 상태에서 이런 질문들을 제기하고 스스로가 답을 찾아 자신의 존재적 목적을 찾기만 하면 나머지 모든 일들이 가능해진다. 그래 기본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자신을 성찰하는 고독이 동반되지 않는 교육은 성공하기가 힘들다. 우리는 고독을 생산하는 수고와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 고독한 시간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소한 것들을 일거에 소멸시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남길 수 있는 시간이다. 독립적 주체로 성장시키는 특효약이다.

히브리어로 인간을 말하는 '아담(adam)'이라는 말은 붉은 흙(테라 로사, terra rosa)이라는 의미이다. 이 테라 로사는 우리에게 최고의 곡식과 와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최상의 흙이다. 그런 나는 잠시 생명을 부여 받아 들숨-멈춤-날숨을 반복하는 살아가는 인간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흙으로부터 와서 잠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을 되돌아 보면, 나에게 남은 시간도 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문화와 문명을 구축하였다.

그런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내가 소유한 자동차와 같다"고 배철현 교수는 멋지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자동차가 나를 운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 시동을 걸어, 목적지로 향하도록 운전하는 사람은 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증명하는 서류가 아니다.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되어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동차인 줄 아는 내가, 운전자인줄 모르고 인생을 살아왔다. 우리의 교육의 목적은 남들 보기에 경쟁력이 있고 이윤을 많이 남기는 자동차 만들기이다. 우리의 교육이 최고의 운전자를 만드는 데 소홀하다면, 그 자동차는 고물이다. 우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운전자이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이며, 그렇게 만들 자신만의 영적인 도구를 가지고 태어났다. 히브리어는 인간을 말하는 아담 말고, 네페쉬(nepesh)라는 말로 '특별한' 인간을 표시하였다. 신이 진흙으로 만든 인간의 코에 숨을 불어 넣으니, 인간(아담)이 살아 있는 영적인 존재(네페쉬)가 되었다고 히브리 시인은 노래한다. 인간은 매 순간이 생동하는 영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인 아담이 아니라, 매순간 살아 움직이는 네페쉬이다. 네페쉬는 우리가 가진 언어의 구분을 초월하는 단어로 "존재, 영혼, 생명'이란 의미이다.

인도경전 『우파니사드』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기쁨은 이 세상의 모든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쾌락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배철현 교수의 <매일 묵상>에서 얻은 생각이다. "당신은 당신의 깊은, 그리고 당신을 인도하는 열망입니다. 당신의 열망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의지가 있습니다. 당신의 의지가 있는 곳에 당신의 행위가 있습니다. 당신의 행위가 있는 곳에, 당신의 운명이 존재합니다." <우파니사드 브리하다린야가, IV 4,5)

'열망→의지→행위→운명', 이런 순서이다.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열망, 그것이 인간이다. 그 열망을 잃는 순간, 인간은 그냥 흙이며 곡식의 껍데기 일 뿐이다. 인간은 그 사람의 생각이다. 건강은 내가 내 육체에 투입하는 생각의 양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간으로 우리 자신에게 바라고 훈련하는 열망 만큼의 결과이다. 우리는 자신을 멋진 집으로 착각한다. 훌륭한 거주지가 없는 집엔 거미줄만 가득하다.

인간은 자신에게만 유일하고, 그러기 때문에 위대한 인생의 과업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다. 보통 우리는 스스로 두려움과 불안으로 혹은 가족적이며 사회적인 제약과 책임으로, 자신의 열망(熱望)을 찾지 않으며, 그 결과 자신을 가장 자신 답게 만드는 잠재력을 실현시키지 못한다

쇼펜하우어는 네페쉬를 찾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내적인 그리고 외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길 촉구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장점과 단점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지 않은 힘을 발휘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위조 동전을 가지고 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남을 흉내 내는 거울 놀이는 결국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인양 시도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 왜곡되고 사악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흉내를 내는 것처럼 개탄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우스꽝스럽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쓸데없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인간이 '현대'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라고 말하였다.

자신이 열망하는 모습을 상상하여 일상에서 매순간 구현을 시도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이 원하는 인간이 된 것이다. 열망하는 자신의 모습은, 숙고를 통해, 그런 모습을 매일 새롭게 상정하고, 그것을 위해 진심으로 노력할 때,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이루었다고 자만하는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이기도 하다. 신기루는 잡힐 수 없고, 잡히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열망이란 자신이 열렬히 바라는 희망이란 말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이다.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군자(君子), 성인(聖人), 선비이다.

나는 누구인가 대신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를 질문할 때, 대답을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배철현 교수는 열거한다.
- 그런 자신을 한 번도 고민해 본 적이 없다.
- 자신의 처지를 남과 비교하여 비관하고 일생을 주위 탓하며 살았다.
- 미디어를 통해 소위 성공을 돈과 연결하여 타인과 불필요한 경쟁을 일삼아 왔다.
그 뿐만 아니라, 교육이 각자에게 알맞은 유일무이한 자신의 과업을 찾도록 유도하거나 자극하는 체계가 아니라, 많이,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외우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우리를 세뇌시켜왔다는 것이다. 인생의 불행은 자신이 되고 싶은 자아상이 없을 때 시작된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없으면,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고 행복할 수 없고, 집중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열망하는 그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인생이 살맛 난다. 내게 그런 열망이 없다면, 나는 바람에 나부끼는 겨와 같다. 약간의 바람에도 날라가 버리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가 된다. 열망은 그 겨가 둘러싸고 있었던 낱알이다. 나는 내가 되고 있는 그것을 위해, 지금 여기서 그것을 향하고 조금씩 전진한다. 나는 그것이 되어 가고 있는 과정(過程)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우주 창조 이야기를 풀어낸 『티마이오스』에서 우주 구성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상적인 목적을 ‘존재(存在, being)로, 그리고 그것이 되는 과정을 ‘생성(生成, becoming)'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 생성이 이루어지는 삼라만상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관용적인 이 광대한 공간을 ‘수용체’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하였다. 그 무엇이 되어가는 현상을 포용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없는 신비다. 그는 이 신비한 공간을 고대 그리스어로 ‘코라(chora)라고 불렀다. 코라는 질서와 무질서가 대결하고 화합하는 장소이자 시간이다. 내게 오늘은 코라이다.

오늘은 내가 열망하는 것을 나의 ‘재능’으로 만드는 공작실이다. 인간 각자에겐 자신만의 재능이 마음속에 존재한다. 어떤 이는 그 재능을 발견하여 자신의 삶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자족하며 산다.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재능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다가 인생을 망치고 마친다. 재능은 사적이며 독창적이고 다를 수밖에 없다. 만일 재능이 내 친구나 경쟁자의 재능과 유사하면, 그것은 거짓이다. 우리가 각자 지닌 재능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다. 유대교는 이 존재를 ‘신의 형상(imago dei)'라고 불렀고,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거룩한 영혼’이라고 명명했다. 그것을 발견하는 사건이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 묵상(默想)으로 시작된다. 묵상이란 자신 안에 숨겨진 신적인 불꽃, 즉 ‘재능’을 발견하기 위한 응시(凝視)다. 응시는 자기 절제이며, 내 자신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위한 연습이다. 응시는 내 삶을 장악하는 나의 동기, 편견, 행동거지를 나의 이상과 견주어 보고, 그것들을 침착하고 냉정하며 공평한 눈으로 보고자 하는 분투(奮鬪)이다. 정신적이며 영적인 평정심을 발휘하지 않는 하루는 시냇가에 떠내려가는 부초다. 이 응시는 나를 내 삶을 지배하는 지혜로운 왕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내 삶을 지옥으로 독재가가 되기도 한다. 매일 <배철현의 묵상>을 읽고 내 생각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여러 번 읽을 필요가 있다. 번잡하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즉 고독한 상태에서 여러 번 읽어야 한다. 그게 기본이다. 이 기본을 알면 나머지 모든 일들은 가능해진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유성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김용택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