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휘트먼은 새로 태어날 미국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말 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페이스북은 매일 내가 과거에 포스팅한 글을 <과거의 오늘>이라는 항목에 올려준다. 이것들을 선택하여 <인문운동가 박한표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룹에 모으고 있다. 어제 글에서 멋진 글을 만났다. "동사적 삶이란 경험자들의 이야기에 매달려 살기보다 직접 불확실성을 껴안고 덤비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 얻은 사람의 답은 펼치지 않는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토로나-19로 불확실성이 팽배한 데, 불안해 하지 말고,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면 된다. 그래 동사적 삶을 사는 사람은 이런 활동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나는 어떤 가?

▫ 대답하는 사람보다 질문하는 사람인가?
▫ 종속적인 사람보다 자유로운 사람인가?
▫ 패륜(悖倫)적인 사람보다 윤리적인 사람인가?
▫ 훈고하는 사람보다 창의적인 사람인가?
▫ 따라하는 사람보다 먼저 만드는 사람인가?
▫ 비굴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용기 있는 사람인가?.
▫ 답습(踏襲)하는 사람보다 도전하는 사람인가?

솔로몬은 <전도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 아래 있는 삼라만상의 활동에는 시간(時間)과 기한(期限, 유통기간)이 있다." 시간은 인간들이 천체의 움직임을 보고 그 반복성을 인위적으로 구분한 체계이며, 기한은 삼라만상이 우주의 일원으로 자신의 해야 할 임무를 마치는 단위이다. 기한은 인간을 포함한 동, 식물에게 '정해진 운명적인 기간'이다. 배철현 교수의 <매일 묵상>에서 얻은 생각이다. 내 주말 농장 옆 밭은 벚나무를 키우는 곳이다. 그래 밭 전체가 벚꽃으로 만발했었다. 그런데 그 기한이 10일 뿐이었다. 벌써 이번 주엔 꽃은 간 곳 없고, 푸른 입들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일 년에 한 번, 10여일 동안,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뽐내던 벚꽃도 이 기한을 안다. 한 송이 한 송이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마쳤기 때문에, 풍장(風葬)으로 허공에 뿌려졌다.

벚나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 고귀한 생명을,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위해 시간에 맞추었을 뿐이다. 나무들은 그저 그렇게 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 인간만이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모른다. 그 임무를 모를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역경(逆境)과 시험(試驗) 그리고 시련(試鍊)이다. 코로나-19가 그런 것이다. 어쩌면 나무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다. 이런 시련이나 역경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임무가 무엇인지 알려주려는 유일한 통로이다. 인간에게만 행복과 불행이 있다. 행복과 불행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결정한다.

우리가 행복을 당연하다고 여긴다든지, 그런 행복이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행복은 서서히 불행으로 변모한다. 반면, 우리가 행복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덜 운 좋은 사람들과 나누기를 시도한다면, 그런 행복은 지속된다. 설령 금방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불행을 덤덤하게 견디며 앞으로 다가올 행복을 준비하는 발판으로 삼는다. 사회적, 아니 물리적 거리두기가 5월 5일까지 연장 되었다. 그래도 나무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변해 갈 것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내 농장의 옆 밭이다. 벚꽃은 간 데 없고, 점점 나무들이 푸르러 진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연두/정희성

봄도 봄이지만
영산홍은 말고
진달래 꽃 빛까지만

진달래꽃 진 자리
어린잎 돋듯
거기까지만

아쉽기는 해도
더 짙어지기 전에
사랑도

거기까지만
섭섭기는 해도 나의 봄은
거기까지만

최근 코로나 19를 보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잘 보이지도 않는 미물과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취약한 동물이다. 판데믹(pandemic)-세계적 유행병)은 바이러스가 이제 인간의 계산인 역학 조사를 뛰어 넘어 모든(pan) 사람들(demos)에게 무차별적으로 전파된다는 심각한 경고이다. 중국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종착점이 이탈리아 밀라노이고 중간 지점이 이란이다. 일대일로가 쑥대밭이다. 리더는 항상 그 나라 수준의 평균이다. 트럼프는 오만(傲慢)하다. 그는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라는 자극적인 캐치프레이즈로 미국 대중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이기심을 부추겨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오만하다. 그리스어로 오만을 '휘브리스(hybris)'라고 한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 앞에 온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다. 이 아둔을 그리스어로 '아테(ate)'라고 한다. 이 의미는 빛이 하나도 없는 컴컴한 숲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더듬는 어리석음이다. 이 아테의 짝이 '네메시스(nemesis)'이다. 네메시스는 건방지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당연히 맞이할 수 밖에 없는 무자비한 정의나 복수이다. 네메시스는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는 정의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 없다. 지나고 보면, 그런 사건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미국 민주주의의 얼개를 담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면, 월트 휘트먼은 미국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독립선언시를 썼다. 그 시가 바로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라는 시다. 이 시의 첫 곡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나를 축하하고 나를 노래한다.”

나의 유일한 축하의 대상, 그리고 예배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기리고 노래한다’. 구글과 페이스북으로 대변되는 21세기 IT세계는 나를 내가 아닌 다른 것을 탐닉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컴퓨터와 핸드폰을 통해, 많은 시간 동안 나의 관심을 장악하여, 나를 관찰하고 조절하는 ‘빅 브라더’이다. 그들은 나에 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 내가 흘려보낸 과거를 근거로, 나에게 나는 ‘과거의 나’라고 자꾸 말을 건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나인데, 나의 두발을 묶어 과거의 나로 화석화한다. 휘트먼이 첫 문장에서 사용한 ‘나 자신(myself)은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나’이다. 그 것만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칙이다.

그리고 시인 월트 휘트먼은 <내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 1855년)>라는 시의 제3단락 첫 부분에서 ‘말만 하는 문화’를 이렇게 말한다.
“저는 말 만하는 사람(말쟁이)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이 어떠하고 마지막이 어떠하고.
그러나 저는 처음과 마지막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 시급한 시작은 없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 젊은 시절이나 시대는 없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 완벽은 없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한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휘트먼은 새로 태어날 미국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말 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철학자들, 평론가들, 정치가들, 전문가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 이들은 처음과 끝을 이야기한다. 그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현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현 상황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휘트먼 자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유통기간이 있는 허약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只今)’이다. 이번에 당선된 21대 국회의원도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오히려 침묵해라!

침묵은 습관적으로 말하는 우리를 제어하는 훈련이다. 침묵은 자신이 우연히 경험하여 아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경청하는 훈련이다. 침묵은 우리에게 관찰과 경청을 요구한다.
- 상대방의 말을 건성으로 그저 듣지 말고, 귀를 쫑긋 세워 상대방 말을 경청하라는 명령이다.
-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화 자찬하는 말을 억제하고, 상대방의 말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보지 말고, 그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 심중을 파악하고 관찰하라는 명령이다.
입은 하나이고 눈과 귀가 두 개인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유성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정희성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