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7.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7월 18일)

스캇 팩(Scott Peck)은 자신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을 "삶은 고해(苦海)다"로 시작한다. 소제목은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다"이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삶이 힘들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하는 거다. 우리가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건이나 갈등이 야기하는 바로 이 고통 때문이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기본적인 도구가 훈육(訓育)이다. 훈육 없이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온전한 훈육이 필요하다. 이 말의 사전적 정의는 "가르쳐 길러 냄"이다. 그래 길이 좀 길더라도 자기 훈육을 위해 시간 내야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훈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학교가 온통 입시 위주의 경쟁 체제로 공부를 잘하면 다 용서가 되는 '이상한' 학교 문법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가 말하는 "지지(知止, 그칠 줄 암)"도 훈육의 한 가지라 생각한다. 예컨대, '자기 훈육'말이다. 영어로는 'self-discipline'이라 한다. 교육학 용어로 훈육은 '사회적 규제나 학교의 규율과 같이 사회적으로 명백하게 요청되는 행위나 습관을 형성시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반복에 의한 습관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공동체나 사회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여러 가지 바람직한 습관을 형성시키고, 더 나아가 규율위반과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를 교정하는 것을 말한다. 훈육을 통해 습관을 형성시키는 것보다 행위를 교정하는 데 초점을 두면, 훈육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린다. 그래서 상과 벌에 위한 훈육보다는 대화나 상담을 통한 심리적 교육의 원리를 적용하려고 애를 쓰는 쪽에 더 방점을 찍고 싶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오로지 문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바로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는 고통을 통해서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고통을 느껴야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주변에서 맴돌려고 한다. 문제 안에서 괴로워하기 보다는 문제 밖으로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이때 만들어내는 것이 <<IQ 정전>>의 아Q가 쓰는 "정신승리법"이고, 우리는 쉽게 거기에 빠진다. 주인공 아Q는 힘없고 비겁한 날품팔이이다. 모욕을 당하면 자기보다 약한 자를 찾아 분풀이를 하고, 그것이 안 되면 그 모욕을 머리 속에서 자신의 승리로 바꿔버리는 사람이다. 오로지 상황을 왜곡시켜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정신적으로 이겨내는 삶이다. 루쉰은 아Q의 무력감과 노예근성을 정신승리라고 비유하며 작품 내내 비판했다. 루쉰은 아Q의 "자기 합리화적인" 삶을 통해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과거의 환상에 의지해 살아가는 중국인들을 풍자한 것이라 했다.
스캇 펙은 "문제와 이에 따르는 고통의 감정을 피하려는 이러한 성향이 정신병의 근본 원인"이라 했다. 칼 융(Carl Jung)은 "신경증(노이로제)이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라 했다. 이런 경우 치유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시들어간다. 그래 훈육이 필요한 거다. 고통을 겪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문제에 직면하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거다. 자신에게도 말이다. 이런 경우는 자기 훈육이 될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훈육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이다. 이 훈육은 괴로움을 견디게 해주는 테크닉이고, 문제가 주는 고통을 겪으면서 끝까지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이다. 그 과정 중에 우리는 배우고 성장한다. 그 길이 우리가 "아직도 가야할 길"이다. 저자가 말하는 훈육의 도구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이다.
-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 책임을 지는 것
- 진리에 대한 헌신
- 균형잡기
이것은 복잡한 도구가 아니고,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 대단한 훈련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 했다. 문제는 이 도구의 복잡함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는 거다. 이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없었기에 우리는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가야 한다. 꽃이 피든 안 피든 살아야 한다, 건너가야 한다. 그게 우리들의 생(生)이다. 그게 "아직도 가야 할 길"이다.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이기철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 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를 패망 시키지는 못한다
내려칠수록 날카로워지는 대장간의 쇠처럼
매질은 따가울수록 생을 단련시키는 채찍이 된다
이것은 결코 수식이 아니니
고통이 끼니라고 말하는 나를 욕하지 말라
누군들 근심의 힘으로 밥 먹고
수심의 디딤돌을 딛고 생을 건너간다
아무도 보료 위에 누워 위기를 말하지 말라
위기의 삶만이 꽃피는 삶이므로
케이크를 먹을 때 어떤 부분을 먼저 먹는가? 크림인가? 빵부분인가? 일하는 습관은? 하루를 시작하면서 처음 한 시간 동안은 좀 더 즐거운 일에 시간을 보내고, 그 다음 여섯 시간은 하기 싫은 나머지 일로 채우는가? 아니면 처음 한 시간 동안 즐겁지 않은 일을 먹지로라도 해치우고 나서, 나머지 여섯 시간을 자유롭게 즐기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훈육의 제1도구인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즐거움을 나중으로 미룬다는 것은 삶이 주는 고통과 즐거움을 맛보는 순서를 정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먼저 고통을 맞고 겪고 극복함으로써 즐거움은 배가된다는 것을 아는 거다. 저자는 이것이 "품위 있게 살아가는 방법"이라 하며,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능력을 잘 발달시키지 못한 아이들이 '문제' 학생들이라 했다. 이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 단지 순간적인 기분으로 수업을 빼먹고 학교를 가지 않는다.
- 사회 생활에서도 자주 싸움에 휘말리고 마약을 복용하고 경찰과 마찰을 일으킨다. 충동적인 삶의 방식에 조금이라도 간섭하면 이들은 반항하기 때문이다.
- 약속을 어기고 중요하고 고통스러운 모든 화제는 피해버린다.
이들의 생활 신조는 '우선 지금 놀고 생각은 나중에 하자'는 것이다. 이들은 학교를 중퇴하고 실패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비참한 결혼, 사고, 정신병원, 감옥 같은 곳에 정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이들은 즐거움을 뒤로 미루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일까? 저자는 부모의 양육 방식이 결정적 요인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부모의 절제되지 않은 훈육 때문으로 본다. 그런 부모들은 "내가 말한대로 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는 하지 마라'고 한다. 부모의 삶이 무질서하고 정신없으면서 자녀들에게 절제된 생활을 가르치려는 것은 먹히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의 입이 아니라 등을 보고 큰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비교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어린 눈에 비친 부모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부모가 하루하루 자제하고 조심스럽고 품위 있게 행동하고 질서 정연한 생활 능력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이것이 사는 방식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매일 무절제하게 제멋대로 사는 부모를 보아도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이것이 삶의 방식이라고 믿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뜨끔한 사람들 많을 것이다.
그러나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행동의 모범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 때로 무질서하고 정신 사나운 가정에도 진실한 사랑이 존재한다. 이러한 가정에서는 절제할 줄 아는 아이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부족한 경우 무질서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처럼 무절제하고 파괴적이고 정리할 줄 모르는 아이들을 길러낸다. 결국 사랑이 전부다.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다는 의미이고,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면 아이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훈육이든, 자녀 훈육이든 제대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사랑이 넘치는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결정을 내릴 때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아이와 고통을 함께 한다. 아이들은 다 안다. 부모가 자기와 고통을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당장 고마움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아이들 역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것이 자기 절제의 시작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바치는 시간의 질과 양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부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진정으로 사랑받는 아이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아차린다. 이게 중요하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느낌은 정신 건강에 필수적이며 자기 절제의 시작이 된다. 그것은 부모가 주는 사랑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이러한 믿음은 어린 시절에 획득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왜냐하면 성인이 돼서 그것을 얻기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라 한다.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인 자존감으로,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니는 것이 자기 절제의 밑바탕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면 어떻게해서든 자신을 돌보게 되기 때문이다. 늘 말하지만, 자존심은 다른 이야기이다.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이다. 다른 이야기이다. 자기 절제는 스스로 자신을 돌본다는 거다. 즐거움을 뒤로 미루고 계획을 세우고 일의 순서를 정하는 거다. 이처럼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면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시간을 잘 이용한다. 왜냐하면 자기 시간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면, 시간을 절약하고, 계획을 세우고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부모의 변함없는 사랑과 돌봄을 받은 운 좋은 아이들은 자기 가치를 마음속 깊이 인식할 뿐만 아니라, 깊이 안정감을 느끼면서 성인으로 자란다. 아이들은 생후 6개월 무렵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한다고 한다. 이때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는 그걸 몰랐다. 생후 6개월 무렵, 즉 자신이 부모와는 분리된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은 아주 무력하다는 것을, 즉 모든 삶을 지탱하고 유지하기 위한 온갖 것들을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것이 모두 부모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거다. 아이들에게 있어 부모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죽음과 같다. 그러다가 그러한 두려움은 부모가 버리지 않겠다는 말들과 행동이 일치하면 아이들은 청소년기가 될 때쯤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세상은 안전한 곳이고 필요할 때는 언제나 보호받을 수 있다는 느낌을 마음속 깊이 새기게 된다 한다. 이렇게 세상이 언제나 안전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자유롭게 이런 저런 즐거움을 뒤로 미룰 줄 알게 된다는 거다.
반면 심리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버림받은 채, 세상은 안전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라는 뿌리 깊은 의식 없이 성인에 이른 아이들은, 세상을 위험하고 무서운 곳으로 인식하고 미래에 더 큰 즐거움이나 안전을 보장받는다 해도, 현재의 어떤 즐거움이나 안전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즐거움을 나중으로 미루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은 스스로 훈육할 줄 아는 역할 모델과 자기 존중감이 있어야 하고 존재의 안전함을 신뢰해야 한다. 이러한 자산들은 부모의 자기 절제와 순수하고 일관된 보살핌을 통해 획득된다. 이 것이 우리 부모들이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부모에게서 이런 선물을 받지 못할 경우 다른 곳에서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힘든 자기 투쟁이 요구 된다. 이 문제를 학교 현장에서 키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을 믿게 하여야 한다. 자존감을 키워주어야 한다. 자존감을 프랑스어로는 'dignité(디니떼)'라 한다. 영어로 디그니티(dignity)라 하는 데, 이 말의 뜻은 한 개인은 가치가 있고, 존중 받고 윤리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능력 우선주의이다. 김누리 교수는 이를 '능력주의(meritocracy)'라 했다. 이를 '존엄주의(dignocracy)'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 존엄한 인간을 기르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수월성 교육에서 존엄성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독일처럼 경쟁 교육을 완화하거나 없애야 한다. 김누리 교수는 '경쟁교육은 야만'이라고 자주 말했다. 경쟁 없는 교육이 성숙한 시민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다.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평가 혹은 믿음'이다. 자존감은 다른 이와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 떨어진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실력을 쌓는 것,
(2) 작은 성공을 누적시키는 것,
(3)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
(4)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5) 외부에서 긍정적 피드백을 요청하는 것 등 여러가지가 있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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