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적정 컨택트

코로나-19가 편리함을 걷어내고, 지속가능한 다시 말하면 함께 오래 가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과제를 내주었다. 여러 번 나누어 소개할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의 김용섭 소장의 인터뷰에서, 나는 포스터 코로나-19에 대한 많은 통찰을 얻었다. 그는 트렌드 분석가이자 경영 전략 컨설턴트로 ‘언컨택트'사회를 심도 깊게 진단했다.

살다 보면, 우리는 가장 무서운 게 경험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물론 새상 일을 겪기 전에 미리 알아차린다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러나 경험하기 전까지는 막연하게 두렵고 불편해 보였던 것들울 실제 체험하고 나면, 우리는 그 속에서 장점을 보기도 한다. 요즈음 우리가 겪고 있는 ‘언컨택트 사회’가 그렇다. 어쩔 수 없이 원격 근무, 온라인 수업, 무관객 라이브 공연 등을 경험한 사람들은 ‘비대면’이라는 이 연결 방식에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상이 바뀌면 욕망이 바뀌고, 욕망이 바뀌면 일상도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언컨택트-비 대면'은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만든 트렌드가 아니라, 이미 확장되고 있던 트렌드였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편한 단절이 오히려 일상화된 밀레니얼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 특히 나도 그랬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식당엔 1인용 혼밥 좌석이 늘어나 있었고, 실제 '혼밥'하는 사람들이 쉽게 우리는 볼 수 있었다. 매장엔 말 걸지 않는 서비스가 인기였다. 이미 드라이브 스루 결혼식과 장례식장이 곳곳에 생겨나 있었고, 유럽에선 퇴근 이후 상사와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주장했었다.

지금 우리는, 특히 코로나-19 이후, 과잉 컨택트를 지나 적정 컨택트로 가는 중요한 분기점에 처해 있다. 접촉은 줄이고 접속은 늘리는 ‘언컨택트’가 좋은 것은 우리가 연결될 타인을 좀 더 세심하게 선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언컨택트'가 가속화될수록 수평성, 투명성이 높아져 실력자와 밀도 높은 콘텐츠만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줄여서 ‘언택트(Untact)'라 하는데, 정확한 표현은 ‘넌컨택트(noncontact)'이다. 우리가 ‘언컨택트(Uncontact)’라고 하면, 그건 ‘접촉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접촉하는 방법을 바꾼다'라고 해석하는 게 맞다. 더 많은 연결을 위한 새로운 시대의 진화 코드일 수 있다.

‘빨리빨리'와 ‘끈끈함'이 이종 교배 된 한국 사회에서 '언컨택트'의 변화가 놀라운 현상이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사회'가 티핑 포인트를 맞고 있다. 그러니까 이젠 '언컨택트'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준비를 잘 못 하다고 있다가, 코로나 때문에 갑자기 ‘비대면 사회'에 직면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특히 과거를 살고 싶어 하는 힘 있는 사람들은 최후까지 익숙한 걸 안 놓고 싶어 한다. 예컨대, 2000년대부터 기업에서 호칭 직급을 없애고 조직 문화 수평화를 시도했지만, 바뀐 게 거의 없었다. '쇼윈도 조직'만 늘었다. 위계는 여전하고 후배들은 주눅 들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언컨택트'가 실행되면서 순식간에 위계가 많이 사라졌다. '원격 근무'하면서 얼굴이 안 보이니, 오로지 ‘일'만 보였다고 말한다. 만나면 직함, 나이 때문에 주눅이 들었지만, 화면에선 20명 얼굴이 균등 분할되다 보니, 비로소 수평화가 실현된 것이다.

반강제적 '비대면'이었는데 그 쇼크가 부정적이지 않아서, 우리는 놀라고 있다. 앨빈 토플러가 오래전에 주장했던 재택근무(일명 ‘전자 오두막')를 유럽과 미국은 받아들였는데, 한국은 유독 그걸 받아들이는 데 더디었다. 위계 문화가 강해서 그랬다고 본다. 요즘엔 평생직장이 사라지면서 ‘후배가 일 잘하면’ 선배들이 불안해 한다. 생존의 최우선 조건이 ‘능력’이 된 거다. 밀레니얼 세대는 비합리적인 선배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IT기술과 밀레니얼의 요구로 조직문화 수평화가 목전에 와 있었는데 코로나-19가 ‘언컨택트'로 그 불을 지핀 셈이다.

하지만 많은 곳에서 원격 근무도 코로나-19 이후 원상 복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여전히 관리자들은 통제와 감시를 위해서 ‘출·퇴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는 사람을 직접 보고 감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과거엔 그게 맞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사무실 공간의 기초는 1904년, 미국의 기계공학자 프레드릭 테일러의 ‘테일러리즘'을 기초로 완성한 거란다. 효율적 감시를 위해 오픈 된 공간 안에 빼곡히 책상을 넣고 상사가 고개를 들면 다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1980년대까지 그 구조였다. 1990년대 PC가 들어오면서 파티션이 쳐지고 독립공간이 생겼다. 이젠 그것도 필요 없다. 내가 한 일이 다 데이터로 남기 때문이다. 신기하고 실제적인 게, 안 보고 일하면 효율이 더 높아진다는 점이다. 조직 생활을 하지 않아서 난 잘 모른다.

카카오를 비롯해서 IT 계열회사들은 코로나 이전에도 자율 출퇴근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반회사에서도 출퇴근이 점점 사라질까? 조직문화는 끝까지 기존의 전통을 유지하다가 저항 세력이 더는 저항할 빌미가 없을 때 확 바뀐다. 누가 저항 세력인가? 경영자는 모든 플레이어가 베스트를 다하는 상태를 좋아한다. 베스트를 다하지 않고 버티는 그룹은 중간층이다. 그들은 머릿수에 비해 업무 기여도는 적으며 월급은 많이 가져가는 사람들이다. 컨설팅을 하다 보면 원격근무를 원하는 쪽은 경영자들이다. 수평화가 진행되면 근무 량이 투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경영자는 ‘좋은 사장님’ 소리 듣는 건 소용 없다. 이익을 내고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젊은이가 원하는 조직은 자기 에너지를 다 쏟아 부면, 클 수 있다는 비전을 보여주는 조직이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기업들이 COVID-19로 인해 재택근무를 해보니 이제 누가 진정한 인재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과정(process)이 아니라 결과물(product)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재택근무가 알게 한 세 가지 인재형을 정리하면 이렇다.
- 숫기 없지만 제대로 일하는 유형
- 실력 없는데 정치 잘하는 유형
- 무임 승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