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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욕망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오늘도 김기석 목사님의 다음 이야기를 공유한다. 목사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유토피아는 ‘없는 장소’라는 뜻이다.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조선 시대의 화가 안견이 꿈속에서 거닐었다는 무릉도원이든,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샹그릴라든, 장자가 꿈꾸었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런 장소에 대한 꿈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그 꿈에 담긴 절실한 소망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척박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진동한동 달리느라 사람들은 자기를 돌아볼 여유를 누리지 못한다. 누리지 못하는 삶은 그늘로 남는다."

욕망이라는 것이 우리 생존의 동력이지만, 욕망의 벌판에서 질주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자신이 고립돼 있음을 자각할 때가 온다. 욕망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개별 화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별 짓기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타자를 위한 여백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욕망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우리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 기준은 욕망과 행동이다. 쉽게 말하면, 나란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의 욕망과 행동을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욕망과 행동을 바꾸면 된다. 그런데 왜 안 할까?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인식과 사유라는 정신활동을 하지 않으면 행동의 패턴이 절대 안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일차적으로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이때 욕망은 충동에 가깝다. 삶을 능동적으로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쾌락을 증식하는 쪽으로 수동적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이든 내 것으로 소유하고, 거기에서 오는 쾌락을 만끽하고, 그게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는 식의 패턴을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패턴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게 어리석음이, 불교 용어로 말하면, 무명(無明)이다. 본성을 완전히 가리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태양이나 산과 들로부터 공짜로 얻는 게 많다. 그러니 우리는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속에서는 돈이 돈을 낳는다는 사실만 믿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오로지 박탈감만 느낄 뿐이다. 그래 현대 인들은 벌어도 벌어도 불안해 한다. 그들은 스펙이나 재산하고 등가가 되어 버렸다. 나란 존재가 화폐로 환원되니까, 자존감이 떨어진다. 그래 도박이나 성에 중독되거나 다른 이들 한테 갑 질을 한다. 그리고 소유와 쾌락을 중심으로 욕망을 추구하다 보니 늘 불만족이다.

이 사슬을 끊으려면 욕망과 행동의 동선(動線)을 다시 그려 보아야 한다. 재배치가 필요하다. 고립과 단절이 아니라, 대칭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동선을 재배치해야 한다. 등가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욕망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소유와 증식을 향해 나아갈 때, 그리고 쾌락의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할 때가 문제이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더 부추긴다. 그러니 그 구조와 사슬을 철저하게 성찰하고 그런 욕망의 궤도를 자아라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유와 쾌락은 생명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서는 창조가 아니라, 쾌락 혹은 퇴행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행동의 동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그러려면 욕망도 재구성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고립과 고독은 삶을 무겁게 만든다는 점이다. 영혼의 회복력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  공간으로서의 장소이든 사람들이 맺는 관계이든 상관없다. 미셸 푸코는 현실화된 유토피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헤테로토피아가 그것이다. 그곳은 어떤 권력 관계도 작동하지 않는 세계다. 여기가 새롭게 꿈꾸는 '메타버스'일까? 위에서 아래로 계열화된 질서가 아니라, 마치 잔뿌리들이 한데 어울린 평등한 생태계이다. 사람들을 가르던 온갖 장벽이 무너지고, 낯선 이들이 우애를 나누며 일체를 경험할 때 삶은 가벼워진다고 믿는다.

공동체가 바로 그런 곳이어야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하게 연결돼 생명과 평화의 생태계를 이루는 곳 말이다. 현실이 지옥처럼 느껴진다고 투덜거리기만 할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은 천국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고립을 넘어 연대하려는 용기 아닐까?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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