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글입니다.
희망을 주어야 하는데, 사회가 꼴이 아니다. 나 자신부터 밀려난 자이기에 능동적으로 택한 삶의 문법은 아니지만, 많은 성찰과 배움으로 나만의 삶에 충실하며 남은 삶이라도 가장 나답게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인서울 하지 못한 지잡대는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권위적 목소리에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비단 사회이슈에서만 그럴까. 강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대체로 방관자적 태도로 뒷자리와 가장자리를 고수하려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바퀴벌레냐, 벽에 가서 달라붙게’라고 웃픈 농담을 하지만, 생애 대부분을 ‘들러리’ 역할에 충실했던 이들의 태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들러리에게 이 사회를 이끌어갈 주체성과 책임의식, 공동체적 삶에 대해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개그이다. ‘입이 없는 하위주체’들에게 어떤 주체적 행동을 요구하겠는가. 어느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 )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보시길.
“일반적으로 사람은 ( )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관계망이 감소 내지 단절됨으로써 사회적 상호작용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러한 현상은 ( ) 본인들의 욕구와는 별개이다. 그 결과 ( )들은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자아존중감이 크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 )들은 쉽게 좌절하며 강한 열등감으로 인해 불안한 심리상태와 함께 소극적인 생활태도를 갖게 된다.”
정답은 노년기, 노인이지만 청년기, 청년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관계에 서툴러 오타쿠 아닌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린 청춘들, 부정적 자아의식과 열등감,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곳 청년들은 거의 독거노인과 다름없다.
기숙사나 자취생활을 많이 하는 지방대 학생들은 절대적으로 외롭고, 편의점의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때우는 궁색한 생활을 하기 쉽다.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앓아도 고립돼 있어 방치되기 쉽다. 대학 신입생들 수업에서 어떻게 ‘독거’를 잘 영위해 나갈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다든가, 짝꿍을 만들어주어 서로 생존을 확인토록 하는 일은 웃기지만 실제 현실이다.(정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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