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5.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2021년 4월 2일)
어제 저녁에 페이스북을 보다가 "무위이무불위(無爲而不無爲)"라는 문장을 만나, 한 참 생각을 했다. (사)새말새몸짓-나와 세상을 바꾸는 만남(이사장 최진석), <책 읽고 건너가기 4월의 책으로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임진왜란 7년 피와 눈물로 쓴 통렬한 반성의 기록>이 선정되었다.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는 삶에서 생각하는 삶, 대답하는 일상에서 질문하는 일상으로 건너가자는 일관된 끈에서 한 달에 한 권 읽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건너 가기를 시도해해야, "질문하는 습관이 만드는 생각의 힘"(김경집)이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 책을 소개하며, 최 교수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으면 잘못한 후 그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서 반성한다"고 했다. 생각하는 능력이 없으면 마음을 써서 반성하지 못하므로 잘못을 반복한다"고 말했다. 왜 그럴까?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담벼락에 한 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無爲而不無爲 지혜롭게 삶을 통찰하고 진실되게 저를 향해, 건너가게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교수는 "책 읽고 건너 가기"라는 말을 한다. "책읽기는 '마법의 양탄자' 타는 일이다. '다음'을 향해 넘어가는 일이다"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을 하게 하는 힘을 상상력 또는 창의력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 힘은 책을 읽는 데서 나온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 '다음'으로 넘어가게 해주는 힘이 가장 높은 지혜이다.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원래 머물지 않고, 건너가는 존재이다. 멈추면 부패하고, 건너가면 산다. 양심도 건너가기를 멈추면 딱딱하게 권력화 한다. 건너가기를 잃고 자기 확신에 빠진 양심은 이제 양심이 아니라 폭력이다. 건너가기를 포기한 지식은 시체이다. 도덕도 마찬가지이다. 건너가기를 하게 하는 힘은 책을 읽는 일로 가장 잘 길러진다." 그런 차원에서 어울리는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서 만난 시를 오늘 아침도 공유한다. 아침 사진은 주말에 비가 온다고 해서, 어제 시간을 내서 혼자 즐겼던 벚꽃을 찍은 것이다.
여행자/박노해
여행을 나서지 않는 이에게
세상은 한 쪽만 읽은 두꺼운 책과 같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밖의 먼 곳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
나 자신마저 문득 낯설고
아득해 지는 그 먼 곳으로
하지만 낯선 땅이란 없다
단지 그 여행자만이 낯설 뿐
가자 생의 여행자여
먼 곳으로 저 먼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깊은 어둠 속으로 빛나는 길을 따라
내가 여행하는 이유는 단 하나
나 자신에게 가장 낯선 자인
나 자신을 탐험하고 찾아내는 것
그 하나를 찾아 살지 못하면
내 생의 모든 수고와 발걸음들은 다
덧없는 길이 있기에
매주 금요일 동양 고전 이야기를 하는 말이다. 그래 내 <ONETOTE> 앱에 '무위"를 쳤더니 많이 노출되었다. 그 중 인상적인 것부터 몇 가지 공유한다. 다음 글들은 대부분 최진석 교수로부터 얻은 생각들을 갈무리 한 것이다.
(1) 무위(無爲, 함이 없는 함)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중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자의 <도덕경> 제17장을 보면, 가장 훌륭한 통치자는 있다는 사실만 아는 자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친밀하게 느끼며 찬양하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두려워 하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비웃는다. 4 단계이다.
최고의 리더는 "무엇을 해도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기"(제2장)를 하는 자이다. 통치자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그것을 백성들에게 반드시 실행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통치의 주도권이 통치자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있을 때라야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다. 이는 신뢰(信賴)의 문제이다.
영화나 모든 예술이 다 그렇다. 예술가가 예술 향유자의 수준을 믿어야 한다. 신뢰의 문제이다. 믿지 못하면, 예술가의 의도를 못 믿을까 봐 일일이 설명한다. 예술은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의 경우로 들면, 관객이 영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감독의 '일방통행'을 구경했다는 느낌만 남게 하는 경우에 그 영화는 재미가 없다. 감독의 강압성만 있고 관객의 자발성이 없어진다. 관객은 없고 감독만 남는 형국이 된다.
통치자도 백성을 믿지 못하면, 자기의 뜻을 강하게 관철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통치자가 강한 이념이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신은 자신이 지닌 강한 기준 때문이다. 자식과 부모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불신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는 모두 기준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을 아끼라"(제17장)고 말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라는 말이다. 잔소리는 지켜야 할 것을 부과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삶의 주도권을 리더가 갖는 것이 아니라, 팀원이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발성이 일어나고, 스스로의 존재적 자각이나 자부심이 더 크게 자리한다. 백성도 자식에게도 다 마찬가지이다. 이를 무위(無爲)의 통치 또는 '무불치(無不治)의 지경'라고 말한다.
(2) "무위하면 되지 않는 법이 없다(無爲而無不爲)". 이 문장을 단지 이렇게 해석하면 부족하다. 세상사에서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을 '무위'로 보면서 개인의 안빈낙도와 연결시킨다. 노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위'보다도 '되지 않는 일'이 없는 '무불위(無不爲)의 결과였다고 본다. '무위'라는 지침은 '무불위'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도덕경> 제22장을 보면 안다. "구부리면 온전해지고,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덜면 꽉 찬다. 헐리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노자를 구부리고, 덜어내는, 헐리는, 적은" 것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사실 노자는 온전하고 꽉 채워지는 결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구부리고, 비우고, 덜어내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는 것이 함이 없는 함, 즉 무위이다.
<도덕경> 제7장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만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자신이 앞서게 된다. 자신을 소홀히 하지만, 오히려 보존된다"고 했다. 노자는 앞서고 보존되기 위해서,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할 뿐이다. 노자의 시선은 앞서고 보존되는 결과에 가 있지, 내세우지 않고, 소홀히 하는 소극적인 과정에만 멈춰 있지는 않다. 얇은 지성은 '무불위'로 대표되는 결과를 읽는 대신, '무위'만 읽는다. 공자와 노자가 활약하던 시기처럼, 지금 우리는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새 세상이 열리는 과정에 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완성을 이루려는 사람이 잡다한 현실을 따돌리기만 하면 될 것으로 믿다가는 얇고 창백하며 정체 모를 환각에 싸일 뿐이다. 자신의 힘을 튼튼하게 하여야 한다. 얇고 가벼운 것은 감각적이어서 빨리 오고, 무거운 것은 느리게 온다. 느리게 오는 것이 진짜이다.
(3) '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 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치 절제된 행동과 학교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않고,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만이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 어떤 경지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품질이 들쭉날쭉 할 수밖에 없다.
순자가 말한 "적토성산(積土成山)"("권학편")이라는 말이 곧바로 머리에 떠오른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거기에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물고기들이 생겨나고/산을 쌓고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도가 철학을 좀 아는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착실한 보폭'을 하수의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건 지적인 게으름일 뿐이다.
어떤 개성도 '착실한 보폭'을 걸은 다음의 것이 아니면 허망하다. 허망하면 설득력이 없고, 높은 차원에서 매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많은 일을 그냥 '감(感)'에 맡겨 해버린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높은 경지란 없다. 꿈을 꾸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꿈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외, '무위'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나는 '어떤 자리도 없는 참 다운 사람'이란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말을 아주 좋아한다. 그 반대가 아마 미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프랑스어에 'Non-lieu(농-리외)'라는 말이 있다. 우리 말로 하면 '자리 없는 자리'라는 개념이다. 그 반대말이 우리가 흔히 쓰는 '미친 존재'이다. 그러니까 '농-리외'는 '무위진인', 즉 없는 듯 자리하고 있는 '진짜 나'이다. 마지막으로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도덕경>)이라는 말도 좋아한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인생무상, 공수래 공수거이니 모든 것을 비우고 낮추며 섬기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루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렵고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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