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시입니다.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 우리는 에피쿠로스가 말한 불행의 원인, 일상의 쾌락이 아닌 불쾌함의 원인인 두려움과 허영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네가지 치료법 중 첫 번째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를 살펴 보았다. 어제 아침 글이 길어 유발 하라리의 신에 대한 제언은 덧붙임으로 공유했지만, 조금 손을 봐 오늘 아침 다시 공유한다.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에서 제 13 제언(Lesson)의 제목을 신(神)으로 정했다. 그리고 소제목으로 "신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지 마라"고 했다. 사람들은 신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낮춘 후, 다시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받으면.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우주의 불가해한 신비와 인간 이해력의 한계에 관해 먼저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우주의 신비를 재빨리 세상의 입법자로 대체한 다음, 알 수 없는 우주의 비밀에 '신'의 이름을 갖다 붙이고서, 그것으로 어떻게 든 우리의 일상을 규제하려 한다.
우주의 신비와 세상의 입법자 간의 빠진 연결고리는 흔히 어떤 신성한 책이 제공한다. 이 책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규제들로 가득하다. 이 책은 호모 사피엔스가 쓴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선조가 사회 규범과 정치 구조를 정당화하려고 발명한 이야기일 뿐이다. 예를 들어 신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자 말라는 말은 신의 이름을 입 밖에 내뱉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이익이나 경제적 야심, 개인적 증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무지(無知)에 신(神)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부여한다. 우리는 신이 세상의 입법자로 간주하고, 신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성경에 나오는 말보다 예수가 말한 연민의 정신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이 우리에게 어진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해도, 종교적 믿음이 도덕적 행동의 필수 조건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도덕의 의미는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고통' 을 줄이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심을 기르려면, 나나 타인의 고통을 깊이 헤아리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어떤 행동이 어떻게 해서 자신이나 남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지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그 행동을 멀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 쾌적함이고, 쾌락주의자들의 바램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행복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경감'이라고 말한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최고선으로 규정할 때, 행복해지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물질적 성취만으로는 만족이 오래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신을 숭배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사후 세계는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행복 추구는 개인의 노력에 달린 것이었다. 비도덕적인 행동-살인, 강간 절도- 등이 초래하는 불행은 '고통'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탐욕을 채우는 데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각을 무디게 하면 비인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도덕적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커진다.
신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신경을 쓰는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따라서 자신의 행복도 남들과 관계에 아주 많이 의존한다. 우리는 촘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는 보았다. 따라서 최소한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가족과 친구, 공동체 구성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럼 완전한 이방인라면 살해해도 되는가? 아니다. 낯선 사람이 수시로 강도나 살해 당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한다는 그리스 문화 전통은 의미 있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라는 황금률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대접하라.'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도 마찬가지다. 보편적 연민의 자연적 기초이다. 물론, 훨씬 즉각적인 수준에서 보더라도, 남을 해치면 우리 자신도 다친다. 세상의 모든 폭력적인 행동은 누군가의 마음 속에 있는 폭력적인 욕망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다른 누군가의 평화와 행복을 방해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 자신의 평화와 행복을 깨뜨린다. 마음 속에서 분노나 시샘으로 끓어오르는 한, 기쁨과 조화를 경험할 수 없다. 누군가 타인을 아프게 했다면, 이미 분노가 그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죽인 상태이다.
마음 속의 분노를 눌러야 한다. 그래야 종교적 믿음으로 세상의 평화와 조화에 막대한 기여를 한다. 세상의 입법자로서 신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에 좌우된다. 성직자도 마찬가지이다. 신도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행동의 유형에 달려 있다. 그래 나의 교회 생활을 보면, 우리 성당의 신부님에 따라 신자의 수가 달라진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굳이 신의 이름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세속주의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가치를 얻을 수 있다. 사전에서는 '세속주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회 제도나 그 운영 등에서 종교적 영역을 제거하고, 세속과 종교 각각의 독립적인 영역을 구분하고 인정하자는 주장이나 견해"이다. 세속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상적인 6 가지 가치, 즉 진실과 연민, 평등과 자유 그리고 용기와 책임이다. 여기서 진실과 믿음은 다르다는 것만 말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잘 구별하지 않는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이 진실로 통한다. 세속주의에 대한 글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읽을 수 있다.
어제는 동네 세무서에 갔다가, 꽃에 취해 한 시간 이상을 걸었다. 오늘 사진이 거기서 찍은 것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어려운 에피쿠로스 이야기를 하면서, 문득 산다는 것은 오늘 아침 시처럼, 여러 "단어로 돤" 새로운 "사전"을 쓰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게, 나는 신(神)일 수 없지만, 신에게로 초월하려는, 다가가려는 '웃기는' 일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내 안의 신성(神性)이여!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는 치료 이야기는 오늘 꺼내지도 못했다. 내일 아침으로 넘긴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진은영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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