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심리학자 융 이야기를 좀 해 본다. 지난 번, 융은 인간이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원래의 자신을 찾게 되는 '개인화'의 과정을 주장하며,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상태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외부인 신의 도움이 아니라 인간 내부, 심리에서 찾았다고 나는 말한 적이 있다. 융은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 반응하는 자신을 살펴 의미가 있는 자신을 만나는 과정을 개인화, 또는 개성화라는 용어를 이용하여 설명한다.
사실 '현재의 나'란 존재할 수 없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의 문법은 변화(變化)이다. 눈 깜박할 사이의 나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현재의 나에 만족하고 탐닉하고 안주하는 사람은 시시하다. 미래에 자신이 건축해야 할 자신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되는 사람을 만나면 신나고 즐겁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을 위해 변화무쌍하게 변화 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엉뚱함, 신남, 거침 없음에 매료된다.
변화하는 인간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살해하고 앞으로 될 자신을 시도하고 연습하는 사람이다. 인류의 현인들은 이 과정을 해탈, 각성, 회개, 희생, 오상아(吾喪我, 내가 나를 장례시킨다), 그로시스 등 각 문화 전통에서 개년들을 만들어 냈다.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해 불만을 깨닫고 그 모습을 과감하게 버리는 행위가 희생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그 사람이다. 그 될 수 있는 그 사람이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희망은 가능성에서 나온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다.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 당위이며 의무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자신의 노력을 통해 깨닫고, 그것을 위해 매일매일 수련하여 되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을 선택하여 자신으로 만들 때, 행복하다.
희망은 우리를 살린다. 희망은 언제나 믿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만이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진다. 승리는 언제나 희망을 품고 자신의 목숨을 건 자의 것이다. 희망(希望, 프랑스어로는 espoir)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그리고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가장 마지막에 죽는 것이 희망이다"라는 독일 속담을 알고 있다. 희망의 손을 뿌리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것이다. "정의가 정의로워야 하고, 사랑이 사랑스러워야 하고, 문화가 문화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희망은 희망적이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 동네 아파트인문학에서 하일선이라는 교수가 했던 말이다. 그 교수는 희망을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하고, 그 정의에 '누가' 와 '무엇'을 넣으면, 교육이 희망이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볼 수 있다고 했다. 누구의 자리에 내가 들어가면,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희망인 것이다. 그러면 희망을 이렇게도 정의했다. "희망은 '절망하지 않기'이기도 하다" 그 분은 내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나 아닌 외부의 모두에게도 희망의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하교수는 "희망의 자리"를 나 아닌 친구, 이웃, 학교, 직장, 국가로 넓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교육이 다음과 같이 희망인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 교육이 개인(나)이 희망의 자리가 되도록 하는 일: 학교교육, 평생교육
▪ 교육이 부모(가정)가 희망의 자리가 되도록 하는 일: 부모교육
▪ 교육이 교사(학교)가 희망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일: 교사교육
결국 나, 부모, 선생님(학교), 사회가 희망의 자리가 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다. 여기서 교육의 본질은 자기실현(자아완성)이다. 우리 인간으로서 자기실현은 "인간 다움"이 되는 것이고, 나(개인)로서의 자기실현은 '나 다움'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가족과 사회를 통해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행위를 외부로부터 수용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만든다. 배철현 교수는 이걸 '자기화(自己化)'라고 부른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족, 친지, 공동체, 도시 더 나아가 세계와 우주까지 자기화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개인이 아니라 시민이나 세계 시민, 더 나아가 우주적인 자아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게 만든 체계가 윤리이다. 그 내용은 친절, 배려, 용서, 사랑과 가치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루는 자신이 되어야 할 그 무엇을 발견하여 '자기 자신으로 만드는 '자기화의 과정'이다. 자신이 되어야 할 자신이 없으며 타인을 흉내 내고 부러워 한다면,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인간은 온전히 자신이 될 때 행복하다. 오늘도 행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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