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는 대부분이 다 우화(寓話)이다. 오늘 내 사유의 흐름을 위해, 1편 소요유 14장을 공유한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 하네. 그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칠 수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댈 수 없을 정도이지. 길가에 있지만 대목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네. 지금 자네의 말은 이처럼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어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거네."
장자가 말했다. "자네는 너구리나 살쾡이를 본 적이 없는가? 몸을 낮추고 엎드려 먹이를 노리다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높이 뛰고 낮게 뛰다 결국 그물이나 덫에 걸려 죽고 마네. 이제 들소를 보게. 그 크기가 하늘에 뜬구름처럼 크지만, 쥐 한 마리도 못 잡네. 이제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고을(無何有之鄕)' 널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무위)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는 자도 없을 걸세.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
얼핏 읽으면, 쓸모 없게 사는 것이 차라리 해를 입지도 않고 오래 갈 뿐만 아니라,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냥 편하게 오래 사는 것이 최고라는 낭만적 태도로 보이기 한다. 그렇지만 장자가 말할 때,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장수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최고 단계의 성취를 의미한다.
위의 문장에서 쓸모 없음을 비판할 때, "먹줄을 치지 못하고", "자를 갖다 대지 못한다"고 표현되고 있다. 먹줄은 나무를 재단하기 위해 선을 긋는 데 사용하고, 자는 길이를 정확하게 재는 데에 사용한다. 재단하고 길이를 재기 위해서는 이 먹줄과 자를 피할 수 없다. 먹줄과 자란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기준이다. 만들어지는 어떤 것도 이 먹줄과 자의 지배력 아래서 생산된다. 먹줄과 자는 지배적인 능력을 가지고 군림한다. 문제는 세상이 먹줄과 자처럼 정해진 기준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과거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 또 거기서 미래를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준은 그대로이지만 세상은 변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먹줄과 자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먹줄이 자가 변화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변화에 따라 오히려 먹줄과 자의 쓰임새가 달라져야 한다.
변화에 맞춰 먹줄이나 자의 쓰임새가 습관적이거나 관습적인 사용법을 벗어나야 한다면, 아직 새로운 기준의 먹줄이나 자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접근은 분명히 쓸모 없는 것이라는 평가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쓸모 없음'을 향한 새 도전 나서야 한다. 꿈 없는 작은 쓸모인 '기능' 추구 땐 본질 놓치고 '한계'가 분명히 드러난다. 정해진 기준만 따르는 것은 과거에 종속되고 미래로 발전 못 한다. '쓸모 없음'으로 큰 쓸모를 완성하자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면 쓸모도 달라진다. 이를 먼저 알아차리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필요하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기업들은 뽑을 인재가 없다고 한다. 기업들은 항상 쓸모 있는 것들을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면에서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고 있는 때라면, 쓸모 있는 것에 관한 내용 자체가 달라져서 그 요구는 더 급할 수 있다. 사실 세상의 변화는 무엇이 쓸모 있는 것인가라는 말을 채워주는 내용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지면 쓸모 있는 것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이런 쓸모 있는 것에서 저런 쓸모 있는 것으로의 이동이 변화의 실재 모습이다. 쓸모 없던 것이 쓸모 있어지거나 쓸모 있던 것이 쓸모 없어지는 것을 먼저 알아차려 대응하는 것을 우리는 선견지명이라 한다. 흔히 쓸모 있는 것이 쓸모 있는 것으로 자리잡기 전에는 쓸모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는 쓸모 없는 것이 쓸모 있는 것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쓸모 있음에 갇혀서 쓸모 없음을 지향하는 동력을 상실하면 새로운 도전이나 모험은 불가능하다. 꿈을 가진 사람이 꿈 없이 기능만 행사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성취를 이룬다. 사실 지적 성장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아직 쓸모 없이 보이는 것을 향한 부단한 도전에 다름 없다. 쓸모 있음에 갇혀 있으니 이미 있는 것을 다루는 '대답'만 할 줄 알고, 쓸모 없는 것으로 넘어가려는 '질문'이 없는 것이다. 많은 생각을 최진석 교수의 글에서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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