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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오만

최근 코로나 19를 보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잘 보이지도 않는 미물과 같은 바이러스의 공격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취약한 동물이다. 판데믹(pandemic)-세계적 유행병)은 바이러스가 이제 인간의 계산인 역학 조사를 뛰어 넘어 모든(pan) 사람들(demos)에게 무차별적으로 전파된다는 심각한 경고이다. 중국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종착점이 이탈리아 밀라노이고 중간 지점이 이란이다. 일대일로가 쑥대밭이다. 리더는 항상 그 나라 수준의 평균이다. 트럼프는 오만(傲慢)하다. 그는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라는 자극적인 캐치프레이즈로 미국 대중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이기심을 부추겨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오만하다. 그리스어로 오만을 '휘브리스(hybris)'라고 한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은 자신의 눈 앞에 온 위험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다. 이 아둔을 그리스어로 '아테(ate)'라고 한다. 이 의미는 빛이 하나도 없는 컴컴한 숲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더듬는 어리석음이다. 이 아테의 짝이 '네메시스(nemesis)'이다. 네메시스는 건방지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당연히 맞이할 수 밖에 없는 무자비한 정의나 복수이다. 네메시스는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는 정의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 없다. 지나고 보면, 그런 사건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이 미국 민주주의의 얼개를 담은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면, 월트 휘트먼은 미국의 정신적이며 영적인 독립선언시를 썼다. 그 시가 바로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라는 시다. 이 시의 첫 곡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나를 축하하고 나를 노래한다.”

나의 유일한 축하의 대상, 그리고 예배의 대상은 ‘나 자신’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기리고 노래한다’. 구글과 페이스북으로 대변되는 21세기 IT세계는 나를 내가 아닌 다른 것을 탐닉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컴퓨터와 핸드폰을 통해, 많은 시간 동안 나의 관심을 장악하여, 나를 관찰하고 조절하는 ‘빅 브라더’이다. 그들은 나에 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것 같다. 내가 흘려보낸 과거를 근거로, 나에게 나는 ‘과거의 나’라고 자꾸 말을 건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나인데, 나의 두발을 묶어 과거의 나로 화석화한다. 휘트먼이 첫 문장에서 사용한 ‘나 자신(myself)은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나’이다. 그 것만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칙이다.

그리고 시인 월트 휘트먼은 <내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1855년)라는 시의 제3단락 첫 부분에서 ‘말만 하는 문화’를 이렇게 말한다.
“저는 말 만하는 사람(말쟁이)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이 어떠하고 마지막이 어떠하고.
그러나 저는 처음과 마지막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 시급한 시작은 없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 젊은 시절이나 시대는 없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 완벽은 없습니다.
‘지금(只今)’보다 더한 천국도 지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휘트먼은 새로 태어날 미국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말 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철학자들, 평론가들, 정치가들, 전문가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 이들은 처음과 끝을 이야기한다. 그것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현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현 상황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휘트먼 자신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유통기간이 있는 허약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只今)’이다. 이번에 당선된 21대 국회의원도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오히려 침묵해라!

침묵은 습관적으로 말하는 우리를 제어하는 훈련이다. 침묵은 자신이 우연히 경험하여 아는 세계가 최선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침묵은 경청하는 훈련이다. 침묵은 우리에게 관찰과 경청을 요구한다.
- 상대방의 말을 건성으로 그저 듣지 말고, 귀를 쫑긋 세워 상대방 말을 경청하라는 명령이다.
-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화 자찬하는 말을 억제하고, 상대방의 말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건성으로 보지 말고, 그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그 심중을 파악하고 관찰하라는 명령이다.
입은 하나이고 눈과 귀가 두 개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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