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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교육문법을 말하다. (1)

1583.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자신을 고전문헌학자라고 부르는 배철현 교수는 <월요 묵상>이라는 칼럼을 쓴다. 나는 그 글을 매주 찾아 꼼꼼하게 읽는다. 이 번 주에는 다음 문장을 읽고 각성 했다. "배움이란 각자에게 어울리는 감동적인 삶을 찾아 매일 조금씩 변화하는 수련 과정이다. 스승이란 다른 사람들이 적어 놓은 신기한 내용이나 언어를 암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어 매일 매일 언행이 달라지는 사람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변화하라고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변모하여 제자들에게 그런 변화의 삶을 살아 보라고 친절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변모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은 미소를 짓게 만든다. 손과 발의 움직임이 친절하고 민첩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다."

 

사는 것이 무엇일까? 코로나-19로 인한 5인 이상 집합 금지로 일상이 위축되고, 세상은 선거 판으로 소위 말하는 '개 판'이다. 정책 대결은 실종되었고,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혈투는 보기가 민망하다. 인문운동가로 가장 두려운 것은 국민들에게 정치 혐오를 불러 일으킨다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산다는 것은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 배움의 자세로 자신을 계속 변화 시키는 과정이다. 남 탓하지 말고, 나부터 계속 자신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배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화는 현재의 자신을 개선하겠다고 하는 의지와 그것을 유지하려는 인내가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변화는 그런 변화 중에 있는 자신을 매일 돌아보는 자기 점검이며 격려다. 한자 '변화'(變化)는 그런 뜻을 품고 있다. 갈 길을 찾지 못해 흐트러진 자신(䜌)을 몽둥이()로 고치려는 결심이다. 그(녀)는 현재의 자신(人)을 살해하여 죽은 사람(匕)으로 만들고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 중인 자다."

 

그러니까 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자세를 잃지 않는 일이다.

(1) 현재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개선하겠다는 의지

(2) 그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려는 인내

(3) 매일 매일의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것이다.

(4) 자기를 격려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힘들지만 자신의 향한 부단한 걸음 속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주목한 것은 스승의 자세이다. 여기서 스승은 어른의 자세일 수 도 있다. 다시 한번 더 인용한다. "스승이란 다른 사람들이 적어 놓은 신기한 내용이나 언어를 암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어 매일 매일 언행이 달라지는 사람이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변화하라고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변모하여 제자들에게 그런 변화의 삶을 살아 보라고 친절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1) 항상 밝고 미소를 머금은 웃는 얼굴이다.

(2) 손과 발 그리고 말이 친절하다.

(3) 그리고 민첩하다. 바로 실천한다.

(4)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다.

나는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 (5) 예민하다. 그 예민함으로 나 자신과 세상의 불편을 감지하고, 질문할 줄 안다.

 

이런 마음에서 앞으로 매주 수요일은 우리의 학교 문법을 살펴볼 생각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학교 문법을 바꾸어야 한다 '는 글을 쓰다가 멈추었다. 세상이 양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우리 사회가 교육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효율과 속도의 가치 아래, 무한 경쟁에 모두가 시달리다 보니, 우리는 여유가 없고, 불안해 하며 두려워 한다. 인문운동가로서 나는 인문학적 치유가 매우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담론들이 회자되어야 한다.

 

너무 진지하다. 나는 가급적 경쾌하게 살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나는 마음 속으로 '4라'를 사랑하리라 다짐한다. "춤추라, 사랑하라, 노래하라, 살라." 오늘 아침 시는 오늘의 화두와 어울린다. 아이들은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고 배운다.

 

 

복권 가게 앞에서/박상천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복권이 사고 싶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다.

 

복권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긴 싫어

꾸욱 참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간다.

자꾸만 호주머니에 손이 가지만

아이에게 변명할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 만큼

아이가 자라고 나니

이제 나는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와 인간의 삶을 두 개로 구분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적이며 개별적인 개체가 아니라, 이런 구분은 생각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삶을 조절하는 중요한 가치와 해악의 구분은 모호하다.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구분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구분이 아니라 정도로 보자는 것이다. "만일 A라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그는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서 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이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것이고, 만일 B가 착한 사람이라면, 그는 자신으로부터 나쁜 요소들을 제거하길 힘쓰고 선을 지향하는 과정 중에 있을 뿐인 것이다."(배철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선한 사람은 선한 부분이 51%이고 악한 부분이 49%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과 사람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선은 중용(中庸)이고, 악은 모자람과 과함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품격의 원칙은 중용을 지키는 것이라 했다. 그 반대가 중용이 부족하거나 과도한 상태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무절제'라고 했다. 예를 들어 용기는 무모(無謀)와 비겁(卑怯)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용기는 만용과 성급함의 중간쯤 어디이며, 절제는 낭비와 인색의 가운데이다. 그 가운데를 찾으려는 마음이 중용(中庸)이다. 문제는 중용에 대해 배운 적도 없고, 중용을 자신의 삶에 적용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극단의 유혹에 빠진다는 점이다. 왜 유혹에 빠지냐 하면, 자신의 보 잘 것 없는 정체성이 보상 받기 위해서는, 자화자찬이 특징인 극단적인 무리에 속해, 자신의 쓸모를 끊임 없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우가 상대방에겐 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좌와 우 같은 명칭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행위는, 열등감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속임수일 뿐이다.

 

5년 전에 블로그에 적어 두었던 글이다. "오늘날 우정은 결점이 되었다. 학교에 가는 이유는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 이기기 위해서이다. (......) 요즘은 친구보다 경쟁자를 갖는 게 가장 좋다. 경쟁자들은 이기심을 조장하고 남을 신뢰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다니에 꼴네호, <번개-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롭고 번뜩이는 이야기>, pp, 156-157)

우리나라 교육은 백년대계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백년하청'이다. 중국의 황허 강이 늘 흐려 맑을 때가 없는 것처럼, 한국 교육의 미래가 계속 흐리다. 가장 큰 문제가 교육부의 교육 관료들 때문이라는 지적이 매우 많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교육 관료들에게 교육은 권력이고 기득권의 방어 벽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육의 이름으로 통제와 길들이기에만 몰두한다. 교육 철학보다 교육 공학에만 몰두한다. 이러다 가는 다 망한다. 교육 관료에게는 지금의 시스템이 '꿀 물'이지만, 다음 세대는 '끝 '이고, 그 다음 세대는 '사약'이 된다.

 

이런 교육부의 철옹성을 바꿀 수는 있을까? 연대하여야 만 바꿀 수 있다.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 전환이 필요하다. 연대가 함께 머리띠 두르고 주먹 불끈 지르는 것만은 아니다. 생각을 공유하고 뜻을 함께하는 것이 연대이다. 현재 교육은 신분 고착의 굴레가 되었다. 그런데 교육은 변하지 않고 있다. 무의미한 무한 경쟁만 난무한다.

 

20세기 교육은 사회가 요구하는 노동력에 호응하였다.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의 능력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교육은 답을 빨리 습득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능력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르다. 물론 교육의 본질이 '과거의 사람이 과거의 방식으로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가르치는' 숙명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도 20세기는 그런 교육이 통했다. 사회가 전체적으로 속도와 효율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이젠 그런 것이 안 통한다. 우리는 창의력, 상상력, 융합의 능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가르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힘들겠지만 연대의 힘으로 하면 성공할 수 있다.

 

PS. 백년하청: 중국의 황허강이 늘 흐려 맑을 때가 없다는 뜻으로, 아무리 오랜 시일이 지나도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