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나는 코로나19 이후의 우리의 삶의 방식과 나아가야 할 사회의 모습에 대해 고민을 해볼 생각이다. 오늘 아침 시처럼,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온, 내 "발을 씻으며", "지우며", 새 길을 찾아 보고 싶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철학이 에피쿠로스의 '최소주의(最小主意)'이다. 1960년대에 등장했던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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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순간의 삶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라고 한다. 그의 이름을 따서, 영어로 '에피큐리언(epicurean)'이라 하면, '쾌락주의자', '향락주의자' 또는 '미식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나는 어제 국립한경대 석좌교수인 민승규라는 분의 글을 읽었다. "美ㆍ感ㆍ快ㆍ晴(미ㆍ감ㆍ쾌ㆍ청), 아름다움과 감동, 쾌적함과 푸르름이 있는 우리 농촌이 치유의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농협도 고령 농민을 치유할 수 있는 케어팜 등을 신설해 농민의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지난 6일에는 국민 건강증진을 위한 ‘치유농업 연구개발 및 육성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케어팜의 체계적인 연구 및 지원을 할 수 있는 법적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는 ‘한국형 케어팜 모델’을 만들어, 우리의 아름다운 농촌이 모두에게 넉넉하고 따뜻한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
케어팜(Care farm)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5년 전부터 주말 농장을 하고 있다. 걸어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버려진 땅을 친구들과 개간하여 흙과 자연을 만나고 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도우면서 농사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그래 젊은 시절에는 농사 일에 반감을 가졌는데, 나이가 50이 넘으면서, 흙과의 만남이 좋았고, 나의 지친 몸과 영혼의 치유가 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 다시 생각해 본 것은 '미(美), 감(感), 쾌(快), 청(晴)'이라는 한자어이다. 이 중에 쾌(快)를 스마트폰에 있는 <한자 필기인식 사전> 어플로 찾아보았다. '쾌할 쾌' 자이다. '쾌 하다'라는 말은 '마음이 유쾌하다', 마음이 상쾌하다', '시원하다', 즐겁고 기쁘다'로 풀이 된다. '쾌'자만 소리내도 기분이 좋아진다. '쾌'자가 쓰이는 용례는 '흔쾌(欣快), 쾌거(快擧), 통쾌(痛快), 유쾌(愉快), 상쾌(爽快), 쾌락(快樂) 등이 있다. 듣기만 해도 다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한자어들이다. 고사성어로는 '쾌도난마(快刀亂麻, 헝클어진 삼을 잘 드는 칼로 자른다)', '쾌독파거(快犢破車, 기세 좋은 송아지는 이따금 제가 끄는 수레를 깨뜨린다는 뜻으로, 장차 큰 일을 하려는 젊은이는 스스로를 경계해야 함을 이르는 말), '쾌독파차(快犢破車, 성질이 거센 송아지는 이따금 제가 끄는 수레를 파괴하나 자라서는 반드시 장쾌한 소가 된다. 난폭한 소년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비유한 말), '쾌락불퇴(快樂不退, 쾌락이 오래 지속되어 도중에 그치지 않음) 등이 있다. '쾌'의 반대는 '불쾌(不快)'이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순간적이고 육체적인(動的 快樂)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와 달리.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이었다. 이를 '아타락시아'라 한다. 즉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소극적 쾌락주의'라고도 한다. 이 말은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무제한의 쾌락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을 줄여 나가는 절제된 쾌락주의이다. 에피쿠로스는 행복과 쾌락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쾌락'이라는 말보다는 '쾌적함'으로 바꾸니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육체적 그리고 정신적인 쾌적함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며, 바람직한 삶은 고통, 특히 불쾌함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보았다. 잘 보아야 할 것은 그의 쾌락주의는 방탕함에 빠진 자포자기의 삶이나 식욕, 성욕 충족과 같은 강력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감각적 쾌락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이 에피쿠로스 철학을 폄하(貶下)하였다. 3세기 에피쿠로스 공동체 '정원'이 기원 후 4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유일한 종교가 되면서, 그리스도 수도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당시 삶을 푸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붕괴로 말미암아 정체성과 소속감을 상실하였던 당시 그리스 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우리도 지금 미증유의 코로나19 감염증 사태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가난,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고, 그 결과 삶의 안정을 오직 자신의 정신과 육체라는 개인적 요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비슷한 상황이다. 에피쿠로스는 가능한 개인의 쾌락을 극대화하고, 당장 현실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삶이야 말로 미래가 불확실하고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계속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생각이다. 오늘은 그가 말한 불쾌, 아니 불행의 원인인 두려움과 허영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사치료(四治療, 네 가지 치료)를 공유한다. 이 치료법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욕망을 치료하는 것이기도 하다.
1.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
2.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3. 선한 것은 쉬운 것이다.
4. 최악의 상황은 견딜 만하다.
이 치료법에서는 일상의 반복이 주는 풍요로움을 받아들여 한다. 난 풍요라는 말을 좋아한다.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를 좋아한다. 오히려 물질적 풍요는 경계한다. 삶은 반복적인 습관을 잘 유지할 때, 하는 일이나, 건강이 더 잘 지켜진다. 사람들은 반복을 싫어한다. 반복이 지루함을 만들기 때문이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너나없이 품는 소망이다. 유감스럽게도 전문가들은 비관적이다. 예컨대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 소속 닐 퍼거슨 교수팀이 내놓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최선은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ing)를 유지하면서 바이러스 확산 속도를 늦추는 것 뿐이다. 이 때 사회적 거리두기란 모든 사람이 외부와의 접촉, 즉 학교·직장·가사 활동을 75% 줄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주일에 네 번 만날 걸 한번 보는 식이다. 중환자실 입원이 폭증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감염율을 낮춘다. 언제까지? 백신이 개발되거나 상당수 인류가 면역 체계를 갖출 때, 즉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말이다.
'사회적 거리'로 우리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한다. 이 지루함은 일상의 '반복'에서 나온다. 그러나 반복은 중요하다. 비슷한 음이 반복될 때 리듬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난 삶의 리듬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리듬이 살아 있으면 삶이 더 풍요롭고 하는 일이 더 쉽다. 반복된 것들 속에서 멜로디가 탄생하는 것처럼. 규칙적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고루하고 무거운 느낌만 벗어난다면 반복이 삶에 주는 풍요로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반복을 지루함으로 인식하는 사람과 리듬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삶은 같지 않다. "저는 제 삶을 간결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최소한의 의사결정만 하고 싶어요." (저커버그)
우리가 삶을 반복적이지만 규칙적이게 하는 이유는, 선택의 피로를 줄이고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자신의 뇌를 더 창조적인 데 사용하려는 것이다. 삶이 단순하고 규칙적이어서 뇌가 선택이라는 값비싼 에너지를 많이 쓸 필요가 없어질 때, 우리의 뇌는 뜻밖의 일을 한다. 가령, 비슷한 것 속에서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늘 걷는 길 위에 핀 민들레를 발견하고, 지하철 안 광고 문구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채집한다. 즉 생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흔히 에피큐리안을 쾌락주의자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들이 추구하는 쾌락은 순간의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고요한 마음의 평정심이다. 행복이 쾌락이 아니라 이 평온함이다. 롤러코스트 타는 듯한 변화가 아니라, 잔잔한 호수의 파문 같은 변화에 민감해질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귀 기울여 응답할 수 있다. 오늘도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반복이 주는 풍요를 즐기시면서 좋은 하루를 보내고 싶다. "발을 씻으며".
발을 씻으며/황규관
사람이 만든다는 제법 엄숙한 길을
언제부턴가 깊이 불신하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후끈거리는 발을 씻으며
엄지발톱에 낀 양말의 보풀까지 떼어내며
이 고단한 발이 길이었고
이렇게 발을 씻는 순간에 지워지는 것도
또한 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로는 종달새 울음 같은 사랑을 위해
언젠가는 가슴에서 들끓던 대지를
험한 세상에 부려놓으려 길이,
되었다가 미처 그것을 놓지 못한 발
그러니까 씻겨내려가는 건 먼지나 땀이 아니라
세상에 여태 남겨진 나의 흔적들이다
지상에서 가장 큰 경외가
당신의 발을 씻겨주는 일이라는 건
두 발이 저지른 길을 대시 지워주는 의례여서 그렇다
사람이 만든 길을 지우지 못해
풀꽃도 짐승의 숨결도 사라져가고 있는데
산모퉁이도 으깨어져 신음하고 있는데
오늘도 오래 걸었으니 발을 씻자
흐르는 물에 길을, 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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