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4.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산다는 것은 계속 무언가를 만나는 마주침의 연속이다. 오늘은 '어떻게 마주칠까'의 문제를 사유한다. 왜냐하면 마주침 자체가 중요하지만, 마주치면 변화가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주침을 고대 에피쿠로스같은 자연철학자들은 '클리나멘(clinamen)'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울어져 빗겨감 혹은 벗어남' 또는 어렵게 '편위(偏位, 각도 차이)'라 한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에피쿠로스 파에 속하는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허공 속에서 원자들의 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지고 변화가 일어나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라 설명한다.
내가 이해하는 클리나멘은 대부분의 빗줄기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같은 방향으로 떨어지는데, 그 중에 몇 개는 엉뚱한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이것을 '클리나멘'이라 볼 수 있다. 원래 의미는 '원자 이탈'이지만, 인문학적으로는 타성과 관성에 맞서 이에서 벗어나려는 일탈, '사선으로 내리는 비', '삐딱이'라 말할 수 있다. 나는 '직선을 가로지르는 사선의 힘'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물리학적으로 말하면, 관성적인 운동과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힘으로 해석한다. 원자가 직진운동을 하면, 세상은 하나도 바뀌질 않는다. 동일한 방식으로 돌고 돌 것이다. 반대로 원자가 막 제멋대로 간다고 하면 물론 물질의 구성 자체가 안 된다. 그런데 원자 중에 직진을 하는 듯하면서 살짝 옆으로 미끄러지는 데서 온 세계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자 성어 중에 "실지호리, 차이천리(失之毫釐, 差異千里)"라는 말이 있다. "호리의 차이가 천리의 어긋남을 빚는다는 말이다. 호와 리는 자와 저울의 눈금으로 아주 작은 단위를 뜻하는데, 즉 '호와 리를 소홀히 여겨 잃는다면, 천리의 차이로 벌어진다'라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근소한 차이 같지만 나중에는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클리나멘이란 '비껴 감'에 의한 작은 충돌'이 우리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커다란 생성의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다.
클리나멘에 인문학적 색채를 입히면, '가로 지르기', '사선', '어긋남', 편차', '횡단'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나는 단순하게 '마주침'에 방점을 찍고 싶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 하며 일탈하여 새로운 마주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모두가 '예'라고 하는 상황은, 수직으로만 낙하하는 빗줄기들의 모습이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바로 사선으로 내 특별한 빗방울이다.
벌써 오늘이 1월의 마지막 날이다. 언제나처럼, TWO CELLO의 를 듣는다. <베네딕투스>는 루까 복음 1장 68절에서79절의 '즈카르야의 노래', "Benedictus deus Israel(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에서 나왔다. '찬미'란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 따위를 기리어 칭송함"인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기리는 노래'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톨릭 미사에서, 성변화가 끝난 다음 공 이어, "거룩하시도다"의 후반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 찬미받으소서, 높은 데에 호산사"하고 성가대가 합창하는 짧은 찬가를 따로 베네딕투스라 하기도 한다.
오늘도 기도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가 복음 9장23절). 남해 땅끝 마을에 있는 아름다운 절, 미황사(美黃寺)의 주지 금강 스님이 20년간의 주지 생활을 정리하고 그 절을 떠나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쓴 칼럼에서 큰 통찰을 얻은 아침이다. 두 가지이다. (1) 머무는 마음을 지우자는 것이다. 금강 스님은 아침 마다 다음과 같은 감탄을 하며 일어나셨다 한다. "‘아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눈을 뜰 수 있다니.’ 내가 사는 곳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과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날마다 세상의 마지막 날처럼 완성되게 살았습니다. 어제를 떠나 오늘을 사는 방법입니다. 어제의 생각에 머물면 오늘을 온전히 살 수 없습니다. 그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30년을 하루같이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떠나는 마당에서도 1%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에서도 분명히 그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멋진 삶의 태도이다. 어제를 떠나 오늘을 사는 방법, 머무름이 없는 방법으로 살다 보면, 생의 마지막도 그러할 것이다.
두번째는 고려시대 나옹선사의 시구를 큰소리로 내 귀에 들리도록 읽는 것입니다.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 내 이름을 듣는 이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벗어나게 되고, 내 모습을 보는 이는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에 이르고 열반을 얻으리라.” 한마디로 깨달음을 이루는 부처나 관세음보살이 되어 모습만으로도, 이름만으로도 나의 주변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식으로 풀이하면,'"나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옥의 고통을 면하고, 나의 모습을 모는 것만으로도 해탈을 얻게 하소서'이다.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답이 나온다.
고 김광석의 노래에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이 있다. 그런 그대에게 가고 싶다면, 1월 말이고 내일이 2월이다 라는 것들은 의미 없다. 오늘 아침의 화두처럼, '클리나멘'으로 많은 것들과 접속하고, 그 걸 연결하며, 새로운 배차를 하며 하루를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며, 그 날 주어진 일을 하다가 죽는 거다. 아침 사진은 동네 양품점의 마네킹들이다. 내일 아침 어떤 옷을 만날까?
그대에게 가고 싶다/안도현
해 뜨는 아침에는
나도 맑은 사람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새 퍼부어 대던 눈발이 그치고
오늘은 하늘도 맨 처음인 듯 열리는 날
나도 금방 헹구어 낸 햇살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그대 창가에 오랜만에 볕이 들거든
긴 밤 어둠 속에서 캄캄하게 띄워 보낸
내 그리움으로 여겨다오
사랑에 빠진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그리움 하나로 무장무장
가슴이 타는 사람 아니냐
진정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만큼
새날이 밝아오고
진정 내가 그대 가까이 다가서는 만큼
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라고 이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봄이 올 때 까지는 저 들에 쌓인 눈이
우리를 덮어줄 따스한 이불이라는 것도
나는 잊지 않으리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
지치고 상처입고 구멍 난 삶을 데리고
그대에게 가고 싶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야 할 신천지
우리가 더불어 세워야 할 나
사시사철 푸른 풀밭으로 불러다오
나도 한 마리 튼튼하고 착한 양이 되어
그대에게 가고 싶다
다시 오늘 아침의 화두로 되 돌아 온다. 책 읽기에서 어떤 책을 만나는 마주침은 우연적일 수 있다. 그러나 미세한 차이로 인해 일어나니까, 우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보면 그게 결정적인 변곡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살면서, '클리나멘'을 일으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지금-여기의 시, 공간 안에서 나의 문제의식, 나의 감수성들을 가동하는 것이다. 특히 책과의 마주침은 특별하다. 한 권의 책이 우리 인생의 큰 흐름을 바꾸기 때문이다. 책이란 것은 대상이면서 에너지의 흐름이면서 사물이기 때문이다. 책은 물질과 비물질이 공존한다. 잭 안에 있는 정보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에너지의 흐름에 마주쳐야 한다. 특히 고전은 다차원의 변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전이 아니다. 누가 읽어도 똑같은 내용이라면 고전이 아니다. 우리는 누가 읽어도 똑같은 그것을 교과서라고 한다. 왜냐하면 책 속의 언어는 피부보다 더 신체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든 우리 신체를 통과하면서 뉘앙스, 문법 구조, 배치 등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마주침을 위해 우리는 스스로 사유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에 의하면, 그 사유의 힘과 함께, 좋은 책을 읽으면 이해 여부에 상관 없이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에 집중하는 힘이 생긴다고 한다. 집중력이란 자기가 마주치는 모든 사건과 사물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게 수련이고, 수행이다. 이런 일은 모두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렇게 공부하지 않으면 삶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으면 자존감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있어야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실하게 대할 수 있다. 진실한 태도를 만들어 내는 그 힘, 그게 집중력이고 책을 읽어야 되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그 힘과 지혜는 언제든지 일상에서 꺼내 쓸 수 있어야 한다.
책과 마주치면, 우선은 무심하게 만나야 한다. 이 말은 사심을 버리고 어떤 기대나 통념, 전체를 버리고 읽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무심해야 집중이 잘 된다. 다른 사람과 마주침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말은 그 타자에게 귀를 잘 기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대화할 때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일단 처음엔 그 사람이 자기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최고의 배려이고 진정한 마주침이다. 고 신영복 교수님은 감옥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의 대학이라고 생각하니, 그 순간 만남이 아주 달라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하나의 텍스트이고, 그와 무심하게 마주치는 만남이 하나의 접속하는 접점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살 때가 많다. 그런데 상대가 어떤 말 한 마디로 자신의 조건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일으킬 때가 있다. 책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문득 깨닫게 해준다. 우리 현대인은 자의식이 비대해서 자기 식으로 합리화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그런 식이면 오히려 책 읽기가 자만심을 더 키우기도 한다. 비울수록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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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책을 만나는 마주침이 중요하다. 이 마주침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마주친 대상이나 사건들을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좁은 자신의 자아로부터 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넓게 만나야 한다. 그러면 내 세계가 확장된다. 반면에,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원래 생각하고 있던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되고, 자신의 자아가 더 견고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책을 만나면, 우선 스케치를 하는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모르는 건 쓱쓱 넘어간다. 전체 지도를 훑어 보는 것과 같이 한다. 그리고 다시 읽어야 한다. 영화 보기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보면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디테일이나 연출 소품 등은 대부분 놓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읽었을 때의 감흥에 힘 입어 세 번 읽게 되면, 우연이 필연이 되어 새로운 세계를 열게 된다. '3'이라는 숫자가 담고 있는 변화의 묘미가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말이다. 나도 이 3이라는 숫자의 신비를 안다.
3이라는 숫자는 노자의 『도덕경』 제 42장이 떠오른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껴안는다. 만물은 음양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기운을 조화롭게 여긴다. (……) 그러므로 잃음이 얻음이 되기도 하고, 얻음이 잃음이 되기도 하므로 조화를 취한다. 사람들은 강하게 되라고 가르치지만, 나는 약하게 되라고 가르친다. 강하기만 한 사람은 옳게 죽지 못한다. 나는 조화를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다." 천천히 여러 번 읽어야 하는 글이다. 요약하면, "道가 하나를 낳고"했을 때, 그 '하나'는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太極)이고, '둘'은 음(陰)과 양(陽)이고 '셋'은 천(天)·지(地)·인(人)이다. 조화로운 삼이 낳은 만물 속에서, 잃음이 얻음이 되고, 얻음이 잃음이 된다.
3이라는 숫자는 일상에서 많이 쓰이기도 하고 그 나름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삼각함수, 삼위일체, 삼권분립 등 숫자 3이 포함된 상용어는 매우 많다. 모두 중요한 개념이고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다. 3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세 번은 겪어야 확신이 생기고, 공정성을 기하려면 세 번 정도의 절차는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책을 읽을 때, 사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의 전제를 깨는 거다. 이것을 인문학에서는 텍스트의 흐름을 '절단 채취한다'고 한다. 오늘 아침 이야기는 책을 읽는 독서라는 행위가 여러 있는데, 그 중에서 쓰기를 생산하기 위한 독서이다. 독서라는 행위에는 취미 삼아 읽는 거, 내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발췌하는 거 등 다양하다.
쓰기를 생산하기 위한 독서는 책이라는 텍스트를 읽고 또 읽어서 신체적 케미를 일으키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또 하나의 텍스트를 토해 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글쓰기에 중요한 것은 기승전결이다. 이 문제는 앞에서 이미 한 번 말한 적이 있다. 어쨌든 책을 읽고 리-라이팅하려면, '마주침', 클리나멘이 중요하다. 책과 좋은 인연을 짓는 훈련을 하면, 사람을 만날 때도, 사건을 만날 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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