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2.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오늘 아침도 코로나-19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글이 길다. 크게 이어지는 주제가 세 개이다. 특히 세 번째 주제는 삶의 지혜이다. 지난 주부터 고미숙의 책을 리-라이팅하며, 내공을 쌓고 있다. 오늘 아침은 글쓰기 실전 편의 두 번째 글이다. 고미숙은 말한다. "글쓰기는 혼자 하면 안 된다. 반드시 내 글을 읽고 솔직하게 논평을 해주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쓰기 자체가 누군가에게 말 걸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글쓰기는 그 자체로 네트워크, 즉 세상과 연결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인생과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만나고서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다. 글쓰기는 그걸 언어와 문자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글이 제대로 나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글쓰기 실천 이야기는 골조, 즉 기본 설계도를 만드는 것이라면, 지금부터는 골조에다가 육체를 입하는 거다. 피와 살을 입히는 거다. 그건 목차를 짜는 일이기도 하다. 이건 글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 즉 들은 것, 읽은 것, 관찰한 것들을 다 활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잘 배열하고 적재적소에 쓰는가에 달려 있다. 배열의 원칙은 독창성과 논리성이다. 처음에는 유연하게 풍부하게, 마칠 때는 예리하고 단호하게 하는 것이다. 유연하다는 말은 뭐든지 다 섞일 수 있는 유동성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서 독창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논리적이고 유기적인 완결성이 필요하다.
그 다음에는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해야 한다. '절차탁마'는 "학문, 도덕, 기예 등을 열심히 닦음"이란 뜻이다. 좀 더 풀면, "옥돌을 자르고 줄로 쓰고 끌로 쪼고 갈아 빛을 내다"라는 말이다. 자공과 공자가 <시경>에 대해 나눈 내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君子)는 뼈나 상아를 잘라서 줄로 간 것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처럼 빛나는 것 같다. 말 그대로 하면, '끊고, 갈고, 쪼고, 갈다'이다.
이런 절차탁마를 하는 동안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자의식(自意識)이다. 자의식은 자기에 대한 의식인데,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인정욕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의식은 상처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자의식으로 질투가 발생하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기는 남이 잘 되는 것을 샘하며 미워하는 마음이다. 비슷한 말로 '시새움'이 있다. 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다. 줄여서 '시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시기는 질투와 이기적인 야망과 결합하기 때문에, 다른 악덕을 끌어들여 죄악을 더욱 악하게 만든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고, 누군가의 성공을 보고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퍼킨스는 이를 ‘영혼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즉 자신의 소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소명을 탐하는 것이다. 어쨌든 자의식의 포인트는 자기 자신하고 만 전투를 해야 한다. 그걸 통과해야, '절차탁마'하며 글을 완성 할 수 있다.
'절차탁마'는 문장들을 조금씩 변형시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갈고 쪼고 다듬고 문지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글에 대한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아침 글을 마치고 나 자신에게 박수를 치곤한다. 내가 만족하는 것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글은 나의 생각, 나의 단어 등 나의 정신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내 인식의 지평이 확장되고 보다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안 받고는 부차적인 일이다. 이런 자의식을 비워야 글쓰기가 쉬워진다. 흥미로운 것은 이리 다듬고, 저리 다듬고, 이 접속사를 쓸까 말까, 종결어미를 어떻게 다양하게 쓸까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문장 실력이 늘고 어휘도 풍부해 진다.
실컷 읽고, 허리가 아파 혼자 걸었던 길이다. 내용이 지성을 요구하는 진지 모드이라,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도 좀 재미난 시를 공유한다. 어제 ZOOM으로 하는 회의에서 혼자 "씨팔"했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급적 침묵하리라. 말은 말을 다 하지 않아야 맛이 날 때도 있다.
씨팔!/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 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 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책은 글이고, 글은 결국 말로 이어진다. 글과 말이라는 이 언어가 신비롭다. 이 언어는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떤 사람이 쓰는 언어, 글이나 말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국어로 말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언어도 신체가 아니가 의심한다. 언어학자 소쉬르(Saussure)는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언어를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별한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매우 어려웠다. 흥미로운 것은 결벽증으로 소쉬르는 책을 한 권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언어학 강의』는 제자들이 그의 강의를 듣고 쓴 노트들을 가지고 제자들이 엮은 책이라 한다.
누가 "인간 답게 살고 싶다", "인간으로 살고 싶다" 한 말이 둘 다 비슷한 말이지만, 누가, 어떤 상황에서 그 말을 했느냐 에 따라서 그 문장이 주는 의미는 같지 않다. 그래서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와 빠롤로 나누었나 보다. 소쉬르는 인간의 언어 활동에는 개인차에 상관 없이 누구나 똑같이 지니고 있는 추상적이며 잠재적인 부분의 활동과 개인이나 발음 또는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구체적인 부분의 활동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즉 랑그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구성원들이 동일하게 지니고 있는 언어라면, 빠롤은 그 랑그의 실현 물인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해, 랑그는 추상적인 언어체계라면, 빠롤은 구체적인 개인의 입으로 통해 발화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 우리는 학교에서 언어를 배우는데, 책을 읽고 언어를 배우고, 그 다음에 글을 쓴다. 이 것을 우리는 지성 혹은 로고스라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힘으로 우리는 언어의 길을 통제하면서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이 때 나오는 것이 담론이다. 담론은 언어의 구조이자 배열이다. 개념을 창조함과 동시에 기존의 개념의 배치를 바꾼다. 이 담론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힘이고 권력의 원천이다. 그래서 새로운 담론이 구성되지 않으면, 절대 혁신은 불가능하다. 최근에 박태웅이라는 IT칼럼니스트를 알게 되어 다음과 같은 새로운 담론을 고민 중이다.
- 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정의(定義)'를 내린다는 것이다.
- 데이터 기반 사회가 되려면, 숫자가 말하게 하여야 한다.
-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를 목표로 바꿔야 한다.
- 협상할 줄 아는 사회를 위해 딜(deal)을 가르쳐야 한다.
- 시속 150Km 이상 던지는 투수가 사라진 사회에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 청소년들이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 교육과 정책 운영이 정확한 근거(evidence)를 가지고 이뤄지기를 바란다.
- 인공지능에 맞는 새로운 교육문법이 필요하다.
몇 일동안 위의 담론들을 다룰 생각이다. 새로운 담론으로 우선 정의를 내리고 혁신을 꾀해야 한다. 개인의 삶에도 필요한 내용이다. 물질적 중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많이 벌고 재능을 많이 익히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담론이 창조가 안 되면 자기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될 수 없다. 내 인생의 의미를 내가 부여해야 한다. 이미 세팅된 무대에서만 열심히 내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냥 열심히 일하면, 돈은 번다. 그러나 그 돈은 소비를 가능하게 해주지만, 거기서는 새로운 담론이 안 나온다. 돈만 벌고, 무의미하게 살다 보면, 어는 순간 번-아웃(방전)된다.
이어지는 글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책을 읽고 자신을 성찰하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하며 발원과 집중을 하면 새로운 언어가 나온다. 간절히 뭔가를 원하는 순간, 사람을 자기를 비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만난다. 산다는 것은 계속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다. 특히 최근 SNS 시대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그리고 사람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물과 연결되고, 각종 사건들도 접하게 된다.
어제는 한국종합예술학교 이진성 교수의 칼럼을 읽고, 평소 정리가 잘 안 되던 것들을 해소하며, 잘 정리를 할 수 있었다. 글이나 책을 만나 읽고 타자와 접속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나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작하여, 연결하고 그것들을 재배치하는 것이라면, 삶의 맛있게 살려면, "느끼기, 체험하기 그리고 반복하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 교수의 칼럼도 같은 맥락이라 본다. 몇 가지 그의 중요한 담론을 공유해 본다.
- 인격은 삶에서 경험하고 훈련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경험 중에는 첫 경험이 있고, 반복 경험이 있다. 첫 경험은 날것의 생소함과 신비로움 그로 인한 짜릿함이 있다. 반복 경험은 그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 사탕을 맛있다고 끝없이 먹는다든가, 가려운 곳을 심하게 긁어 상처를 내면 좋지 않다는 것을 학습해야만 한다. 내가 부르는 노래가 소음을 만들어 낼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음악이 될지, 내가 움직이는 붓 길이 혐오감 주는 낙서가 될지 아름다운 화폭이 될지 모른다. 다만 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세상에 이로운 표현을 하는 법과 동시에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해 몸에 배게 해야 한다.
인격은 너무 거창하다. 다만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갖추려면, 경험하고, 나와 남을 그리고 세계를 이롭게 하는 법을 익혀 몸에 배게 반복하는 것이라는 말이 딱 정리가 된다. 그게 멋지게, 맛있게 사는 법 같다.
- 경험과 체험을 굳이 비교하자면 뇌에 입력되면 경험이고 몸에 입력되면 체험이다. 감각을 통해 능동적으로 체험하고, 뇌에서 긍정적으로 인지하는 경험을 한 후에 다시 몸을 통해 그 경험을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산하면 선순환의 경험과 체험이 된다. 반대로 부정적인 경험을 외압에 의해 수동적으로 체험하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의 굴레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부정적인 기운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훈련된 고도의 스킬을 요구한다. 이 때문에 아예 발산을 하지 않고 차단을 해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
경험과 체험이 다름을 인지했다. 뇌에 입력되면 경험, 몸에 입력되면 체험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겠다. 그러니까 열린 감각을 통해 능동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서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이 능동이다. 그래야 선순환의 경험과 체험이 이루어진다. 체험하겠다는 자발성이 중요한 것이다. 강제로 시키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이다. 위의 문장을 꼼꼼하게 읽었더니 다음 글이 바로 이해된다. "선순환의 경험과 체험을 위해서는 올바른 예술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선험적으로 맛있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고 표현하는 예술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감각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반복하며 훈련해야 한다. 미적 감각을 훈련에 의해 완성시킨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마구 휘갈기는 예술을 만든 것과 그것을 보고 아무나 휘갈기면 예술이 된다고 착각하는 것과의 차이가 여기서 나온다." 가장 중요한 문장이 "감각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반복하며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 맛깔 나게 사는 사람들은 감각의 길을 갈고 닦은 사람들이다. 교육과 훈련에 의해 좋은 감각과 나쁜 감각을 구별할 줄 알고, 좋은 감각을 발달시키고 재현시키는 무한반복 훈련 끝에 얻은 결과다. 반복과 훈련이란 단어에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쳇바퀴 돌 듯이 무의미한 반복과 수동적인 훈련은 우리 삶을 무료하고 둔감하게 하지만, 감각이 열려 있는 능동적인 체험을 통한 긍정적인 반복과 훈련은 대가를 만들고 장인을 만든다. 우리의 인격을 완성시킨다.
이 교수에 의하면, 맛깔 나게 사는 사람들은 남다른 특출한 감각을 자랑해서가 아니다. 절대음감이나 절대미각을 소유했다든지, 오감이 더 발달해 있어서 가 아니다. 청각이나 후각이 예민한 경우는 오히려 삶이 피곤 해진다고 했다. 남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벽을 타고 도는 전파의 소리, 저 멀리서 웅성웅성 떠드는 사람들의 소리,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악취와 체취들로 인해 오히려 집중력은 떨어진다.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뇌가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뇌는 스스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보는 거르고,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여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예컨대, 청력 테스트를 하면 분명히 나이가 어릴수록 더 높은 결과가 나타나고,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청력은 여실히 떨어진다. 하지만 뇌 실험 결과 뇌에 도달해서 인지되고 분석된 내용의 양을 비교해 보면 어린 나이보다 30~40대 성인에게 훨씬 많았다고 한다. 청각은 떨어지지만 주어진 정보를 더 빨리 예민하게 뇌에서 처리하는 능력은 더 우수했다는 결과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런 말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보지 않은 채로 응시하고, 귀 기울이지 않은 채로 듣고, 느낌 없이 만지고, 음미하지 않으며 먹고, 몸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움직이고, 향을 맡지 않으며 숨쉬고, 생각 없이 이야기한다.” 절망 대부분이 이렇게 산다고 본다. 그래 글쓰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 길지만 공유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고, 내일 아침에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 가를 사유하고 공유할 생각이다. 그러니까 열린 감각으로 우선 다른 사람과 세상에 접속하고,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여 분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수행한다. 그 수행을 나는 연결과 배치라고 본다. 그러면 자발성이 더 늘어나고. 보다 더 잦은 접속을 통한 체험과 경험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삶이 즐겁고 풍요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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