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8.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3월 26일)
매주 금요일은 동양 고전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계속해서 최근에 열심히 읽고 있는 『장자』 이야기를 이어간다. 몇년 전에는 이런 글을 적어 둔 적이 있다. 주도권이 '우리'에서 '나'로 넘어갈 때, 노자와 장자가 있다. 공자가 인간을 “인”(仁)이라고 하는 본질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면서 그의 철학 체계는 이미 근대성을 대표로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신의 세계를 벗어났다는 말이다. 공자에게서 본질로 서의 “인”은 잘 보존되고 키워져 할 대상이다. “인”이 확장된 최종적인 단계를 그는 “예”(禮)라고 말한다. 근대 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듣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의 철학을 한마디로 개괄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 주자의 말은 매우 정확 해진다. 여기서 “기”(己)는 개별적이고 경험적이며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일상적인 자아다. “예”(禮)는 보편적이며 집단적이고 이념적인 기준이자 체계이다. 그래서 공자의 철학에서는 일상을 영위하는 경험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는 부단한 학습의 과정을 거쳐 보편적인 이념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어야 성숙이 완료된다. 여기서는 '나'보다는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다.
노자는 이와 다르다. 보편적인 이념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선'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이상'(理想)의 지위를 차지하는 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기준으로 작용하면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분과 배제 그리고 억압의 기능은 폭력을 잉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준으로 행사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의 단계를 최대한 약화 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그는 “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한다. 즉 “예”처럼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 '나'(己)의 일상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극기복례”와는 정반대이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우리'보다는 '나'에게 있게 된다. 보편적 이념의 지배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성에 의존하자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의 책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에서 얻은 생각이다.
지난 3월 24일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더 맵고, 자극적인 맛은 늘 유혹적 이다. 만드는 사람이나, 그 걸 먹고 즐기는 사람에게나 마찬가지 이다. 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장강명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1) 매운 맛, 자극적은 것들의 경쟁이 어느 선을 넘으면 사람들이 그런 맛과 그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순한 맛과 담백한 것이 각광을 받는 때가 올까? 강강명 소설가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초에 우리의 눈, 코, 귀, 입이 불공정하다. 게다가 캡사이신으로 매운 맛을 내고 막말을 던지는 게 재료의 풍미를 살리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표준 조율 음을 만들고, 영상물 상영 등급을 정하듯, 라면 맵기와 정치 문화에 대한 성문 규정을 마련해야 할까?
(3) 우리가 각자 감각 기관의 편향된 신호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
(4) 아니면 순한 맛에 보조금이라도 줘야 할까?
이 질문을 듣고, 우리에게 지금은 공자가 말한 '기준'이 '표준'으로 자리 잡고, 극단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잡아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우리'에 방점이 찍혀 있어, '나"로 그 방점을 옮겨와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젠 표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가시 권에서 '하나의 별'처럼 행사해야 한다고 본다. 공자의 예를 너무 고지식하게 해석하지 말고, 그 '예'가 중용, 아니 균형을 위한 표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아침이다.
마른 물고기처럼/나희덕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만 함께 있자고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어두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 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팔닥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몸을 비비는 것처럼
너를 적시기 위해 자꾸만 침을 뱉는다
네 비늘이 어둠 속에서 잠시 빛났다
그러나 내 어두움을 네가 알았을 리 없다
조금씩 밝아오는 것이, 빛이 물처럼
흘러 들어 어두움을 적셔버리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자꾸만 침을 뱉었다, 네 시든 비늘위에,
아주 오랜 뒤에 나는 낡은 밥상 위에 놓인 마른 황어들을 보았다
황어를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황어는 겨울밤 남대천 상류 얼음 속에서 잡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지느러미는 꺽이고 빛나던 눈도 비늘도 시들어 버렸다
낡은 밥상 위에서 겨울 햇살을 받고 있는 마른 황어들은 말이 없다
* 『장자』의 「대종사」에서 빌려옴. "샘의 물이 다 마르면 고기들은 땅 위에 함께 남게 된다. 그들은 서로 습기를 공급하기 위해 침을 뱉어주고 거품을 내어 서로를 적셔준다. 하지만 이것은 강이나 호수에 있을 때 서로를 잊어버리는 것만 못하다."
『장자』의 이야기들은 시인들에게 시의 재료로 쓰인다. 『장자』의 제6편 「대종사( 大宗師, 큰 스승)」는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될 진정으로 '위대하고 으뜸 되는 스승'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굳은 마음(成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2:8), 그런 마음을 말끔히 비우는 '마음 굶기기(心齋)'를 실천해야 한다(4:12)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서는 진인(眞人)이 등장한다. 이 '참사람'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된 스승이다. 이런 진인도 도를 대표하는 사람이므로 궁극적으로 도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위대하고 으뜸 되는 스승' 혹은 스승 중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6:15-37) <도덕경> 제25장에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습니다"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대종사( 大宗師)」 제 1장은 진정한 앎이란 무엇인가 묻는다. "자연이 아는 일과 사람이 아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다. 자연이 아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앎이 아는 것'으로 그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한다. 이리하여 자연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 죽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이 앎의 완성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려운 점이 하나 있다. 앎은 무엇에 근거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앎이 된다. 그런 그 근거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오강남은 이렇게 풀이한다. 우리 보통 인간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 우리 일생을 통해, 이런 저런 선입견에 한번 길들이면 그것을 '만고불변'하는 진리처럼 떠 받들고 산다. 말하자면 세뇌 된 상태이면서도, 이런 상태를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이러한 우리의 무지와 착각과 오류를 지적해서 우리를 일깨워 줄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진인'이 등장한다.
앎이 아는 것이란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되는 것이고,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이란 자연의 깊은 이치이다. 지성이 이런 깊고 신비스러운 이치를 꽤뚫어 볼 때 앎의 완성을 이룰 있다는 것일까? 앎이 바른 앎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입증해 줄 어떤 확실한 척도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지, 혹은 인위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지, 이를 분명하게 해줄 표준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전 부의 나의 화두는 '표준'이다. 어제는 아주 오랫만에 고등학교 선배이시며 막 은퇴하신 교수님과 길게 통화를 했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그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장자가 말하는 성심(굳은 마음) 속에서 글이 10 줄 넘어가면, 남의 글을 읽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는다는 것이다. 그러가나 말거나, 우리 동네에 있는 고택에는 엄정한 계절의 순환으로 홀로 꽃은 피고 지고, 그렇게 시간이, 세월이 흐른다.
늘 하는 말이지만, 세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감당하는 용기, 상상력 부족, , 오만과 자만심, 공감 능력 부족 그리고 삶의 내, 외부 균형 상실 또 하나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데는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미지의 사실을 두려워 하고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바란다. 미지의 사실에 대한 두려움이 그 어떤 폭군보다 더 우리를 마비시킬 수 있다.
세상의 어떤 권위도 우리의 자유를 마비시킬 수 없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일련의 절대적인 해답을 믿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와해 될 거라고 걱정했다. 하지만 사실은 기꺼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곤란한 질문을 제기한 용기 있는 사람들의 사회가, 모든 구성원이 단일한 해답을 무조건 수용해야만 했던 사회보다 더 번영했을 뿐 아니라 더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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