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사진 하나, 생각하나

무엇을 보고 있을까?
본다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본다의 수동태 보인다도 있다.
그림의 그는 나를 보고 있다.

오늘은 사람의 부조리에 대해 '보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산다는 것, 그것은 부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은 먼저 부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 여기서 부조리란 "세계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이다.

부조리, 즉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앞에서 자살은 문제의 소멸일 뿐, 해결이 아니다.
까뮈는 그 문제 해결은 반항이라고 했다. 여기서 반항은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다. 어떻게?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곧 부조리 앞에서,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구원을 호소함 없이 사는 것
-자살로써 회피하거나 기권하지 않는 것
-쓰라리고도 멋진 내기를 지탱하는 것이다.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를 반항하는 인간의 표본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서 반항을 보았다.

까뮈에 의하면, 이 시지프스의 행위가 '무의미에 의미 주기'란 것이다. 이것은 무의미한 삶에 스스로 '반항'이라는 의미를 줌으로써 그 형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까뮈의 말이 이해가 된다.

더 나아가 단순히 '사막에서 버티기'보다 '사막을 건너는 법'은 없을까? 철학자 김용규는 그 답을 이렇게 한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그런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을 잘 알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며, '헛된 희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는 이 것을 '사막을 건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뱅샾62>에 걸려 있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