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초월의 욕구가 있다.
초월을 사전은 두 개로 설명한다.
하나는 "어떤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는 것"으로,
또 하나는 철학적인 용어로
"인식·경험의 범위 밖에 존재함",
"가능적 경험의 영역 밖에 있음",
"의식 내용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일"로 풀이한다.
최진석교수*에 의하면, 초월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는 것,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지는 것,
더 확장되는 것,
더 넓어지는 것,
더 높아지는 것이다.
우린
가장 높고 크게 확장되어 있는 존재로
"신神"을 모셔놓고,
부단히 그 곳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이걸 초월의 욕구라고 한다.
근데, 외재적 초월도 가능하고,
내재적 초월도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통제력의 두께로 초월을 가늠한다.
그러니까 초월의 정도는 자기 통제력의 두께라는 말이다.
얼마나 초월되었느냐가
얼마나 크게 자기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개인적인 초월의 여정에서 학습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역사의 학습.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배우자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에서 학습에 성공하면, 그 역사는 빛난다.
학습에 소홀하면 그 역사는 찬란하기 어렵다.
시대적 사명감을 가진 예민한 지식인들의 투쟁과 학습에 대한 열망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판을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한다.
우리 자신들을 위해.
여긴 역사를 위하거나 조국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도전 정신으로.
기득권과 타성에 젖은 사람들은 시대적 사명을 못본다.
이들은 도전하지 않고, 안주한다.
도전은 '초월'의 동력이다.
도전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밝고 강한 미래를 보장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결정한다.
우린 역사 학습을 잃어버렸다.
일상 속에서 역사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자존감을 지키지 못할 수 있다.
학습은 도전을 하게도 하지만, 최소한의 기품을 지킬 수도 있게 해준다.
초월의 욕구는 자신을 점점 높고 넓게 확장하므로 시대 의식을 포착하게 한다.
초월의 욕구가 살아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으려 애쓰기 보다는
시대의 병을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은 나를 보편의 단계로 확장시키는 방아쇠이다.
이 방아쇠를 당기는 일을 우리는 도전이라고 한다.
도전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만난다.
하나는 도전에서 실패하였을 경우을 걱정하는 질문과
또 하나는 도전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질문을 만난다.
초월의 견지에서 볼 때, 이 두 질문은 질적인 차이가 크다.
도전은 우선 뒤를 돌아보는 조심성이 결여되어 있어야 미덕이다.
이런 미덕이 갖춰져 있어야만 '초월'의 확장이 실현된다.
학습을 통해 두텁고 두터워진 존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그런 존재가 당기는 도전의 방아쇠는 역사의 순방향에 조준되어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 스스로 역사가 될 준비를 진실하게 한 사람은 항상 옳다.
스스로 역사가 되었기 때문에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에 전전긍긍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자유롭다.
두려움도 없다.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던 <장자>의 대붕은 9만리를 튀어 오르는 내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8: 도전이 초월의 동력이다."(경인일보)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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