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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1)

188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1월 23일)

 

오늘도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빛나는 이야기" 부제를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도 어제에 이어 9 "바보의 쓸모"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본다.

 

"바보로 살아라, 신념을 가진 사람을 경계하라" 스승 이어령은 말씀하신다. 알바트로스라는 새가 있다.  날개가 일이 미터 되는 새이다. 그래 새는 하늘을 때는 눈부시지만, 날개가 커서 땅에 내려오면 중심을 잡고 기우뚱거린다. 사람이 와도 도망 가고 쉽게 잡혀서 바보새라고 한다.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알바트로스가 땅에 내려오면 바보가 된다. 그게 예술가이다. 날아다니는 사람은 걷지 못한다.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라는 시 생각 난다.

 

알바트로스/샤를르 보들레르

 

뱃사람들은 곧잘 재미삼아

거대한 바다 새, 알바트로스를 잡는다.

여행의 게으른 길동무인 그 새는

고통의 심연 위를 미끄러져가는 배를 따라온다.

 

뱃사람들이 그 새들을 배 갑판 위에 내려놓자마자

이 창공의 왕자들은 서투르고 부끄러워

가엾게도 커다란 하얀 날개를

마치 노처럼 옆으로 질질 쓸고 만다.

 

이 날개 달린 여행자는 얼마나 어설프고 기운이 없는지!

전에는 그토록 멋지던 그가, 그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보기 흉한지!

어떤 사람은 담뱃대를 가지고 부리를 놀려대고

어떤 사람은 절뚝이며 날아다니던 불구자를 흉내낸다!

 

시인은 구름의 왕자를 닮았구나

폭풍우를 드나들며 포수를 비웃던 그가

야유의 한 가운데 지상에 유배되어

거대한 날개조차 걷는 것을 방해하는구나.

 

 

알바트로스에게서 자기를 사람들이 예술을 하거나, 삶의 흔적을 남긴다. 함석헌의 아호는 ‘신천’(信天)이다. 알바트로스를 우리는 '신천옹(信天翁)' 부른다. 그럼 신천이란 무슨 말인가? 하늘만을 믿는다는 이름이다. 그 스스로 ‘바보새’를 자처했다. 그 신천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그의 스승인 남강 이승훈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이다. “선생님, 저는 신천옹(信天翁)이라는 바보새가 좋습니다. 신천옹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 놈이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먹다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일본 사람은 그 새를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 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입니까?"(함석헌, 《서풍의 노래》 p.349.)

 

말, 언어는 세상을 바꿔 놓을 수 없다.

 

내가 왜 이 위에 서있는지 아는 사람?

이 위에 선 이유는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려는 거야.

위에서 보면 세상이 무척 다르게 보이지.

믿기지 않는다면 너희들도 한번 해봐, 어서.

자신이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다른 각도에서 봐라.

틀리고 바보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나오는 대사이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스승 이어령에 의하면, 모든 아이들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 문제는 천재로 태어나서 둔재로 성장한다는 거다. 하느님이 주신 것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 천재이다. 아이는 스스로 태어난다. 엄마의 의지로 낳는 아니란다. 그런 의미에서 생일날은 의지와 힘이 가장 만개한 날인 것이다. 유일하게 출생일만 하느님이 주신 날짜 중에 우리가 골라서 나온 것이다. 이후로는 전부 남의 간섭과 보호를 받고 산다. 그래 우리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 정해주는 대로 따라가면 책임도 남에게 전가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 인간 답게 사는 재능이다. 특히 자신의 머리로 선택하는 중요하다.

 

대화도 마찬가지이다. 머리를 쓰지 않고, 신념에 사로잡혀 답이 정해져 있는 사람과는 대화 필요가 없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대화가 중요한 거다. 내일 같은 대화를 하면 오늘과 달라야 한다.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답고, 지금-여기가 중요한 거다. 오늘도 내일도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신뢰할 없다. 신념은 위험하다.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인간사인데, '예스'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메이비(maybe) 허용해야 한다. '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다.

 

오늘과 내일이 똑같으면 뭐 하러 사는가? 인생은 나그네 길이다. 반환지가 있을지 언정 목표는 없다.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다. 위에서 계속 인생이 일어나는 거다. 신념에 기대 사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와야 한다. 여행자가 것인가? 승객이 것인가? 그것부터 결정해야 한다. 승객은 프로세스(과정) 생략되어 있다. 위에서 사는 거다. 마찬가지로 꿈은 자체에 있는 거다. 꿈은 이루는 아니라 지속하는 거다. 돈키호테가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던 것처럼 말이다.

 

죽고 나서도 말을 남기는 사람과 죽기 전부터 말을 잃은 사람 어느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인가? 유언할 있는 사람이 행복한 거다. 10 전에 다하고 동어반복 하는 사람은 유언조차 없는 사람이다. 죽음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잃은 양이 돼라.

 

어제와 오늘 아침 화두이다. 화두는 용기의 과제이기도 하고,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길을 잃어도 영영 미아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거친 길에서 손으로 따먹는 열매, 열매에서 맛보는 목자의 은혜와 마침내 성숙한 탕자로 돌아올 집이 있다는 안식 말이다. 그게 '자기' 사는 인간의 아름답고 기구한 운명이다.

 

리빙과 라이프는 다르다. 의식주와 진선미의 차이이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게 진선미의 세계이고,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다움' 세계이다.  자기 무늬를 만드는 거다.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사라지는 , 그게 인생이라면 서글픈 것이다.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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