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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도종환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친구, 절친이란 단어들을 다시 찾아 보고, 배교수의 화요일 아침 글을 다시 읽었다. 김광선의 글 <질문이 답이다>는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인문운동가로 제일 많이 하는 일이 질문(質問)이다. 아픈 몸으로 김광선은 자신에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견디는가 보다. 나도 지난 주말에 옥천 걷기를 다녀 온 후 나 자신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배교수가 푸는 질문이라는 말 간결하다. "질문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재화인 패(貝)를 만들기 위해 양손에 도끼 두 자루(斤斤)를 들고 만들기 시작하는 수고이다. 이 보물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할 장소가 있다. 바로 다음 단계로 나를 인도하는 문(問, 물음)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더 깊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수고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를 읽다 보면, '이렇게 사는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시작된다. 그 소설을 요약하면, 거의 긴 한 줄로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관대작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체면 때문에 자신과 이혼해주지 않는 남편과 어린 딸과 아들 사이에서 지독한 불행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질문(質問)이란 한자는 내가 오늘이라는 숙명적인 과정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내가 반드시 지녀야 하는 가치이다. 그것이 질(質)이다. 질은 남들도 다 확인할 수 있는 양(量)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원칙이자 바탕이다. 질은 보이지 않는 나만의 내공이다. 삶의 질도 질문에서 나온다. 보통 사람들은 수량에 환호하지만 자신만의 전설을 찾아 나선 인간은 질을 다듬는데 하루를 사용한다. 질이란 두 손에  도끼날과 같은 정교한 정과 망치를 들고 자신만의 패물을 만드는 일이다.

배철현 선생의 글을 따라가면서, 오늘 아침 나도 나에게 질문해 본다. 이러한 질문은 답이 없지만, 나를 더 숙고하는 삶으로 이끌 것이다.

첫 질문, "아에카". 이 히브리어는 "나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뜻이라고 한다.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 묻는 것이다. 배교수는 이렇게 푼다. '나는 어디에 있느냐?'라는 문장에서,
-  '너는 지금 있어야 할 곳에 있느냐?'  
- '너는 내일 네가 가야할 곳을 알고 있느냐?' '로 질문을 확대하라고 한다. 더 확장하면,
-  '나는 무엇을 위해 인생을 헌신할까?'
- '나는 무슨 가치를 위해 짧은 인생을 살 것인가?'
-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 수 있는가?'
- 구약성서의 이삭이나 신약성서의 예수처럼, '나는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로 나아가게 한다.

이런 질문에 답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이런 질문은 나의 삶을 더 숙고하게 만든다. 배교수가 내리는 다음과 같은 정의들을 잘 암기할 필요가 있다.
- '어리석음'이란?  그건 우리가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을 찾지 못한 것이다.
- 비겁(卑怯)이란?  그건 우리가 목숨을 바칠 만한 것을 찾았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 행복이란? 우리 자신이 간절하게 열망하는 그것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열망하는 그것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행복하다.
- 고통이란? 그건 소중한 그것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배교수은 "많은 사람들은 그 [고통]의 길이 좁아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않고 남들이 가는 넓은 길로만 가고 싶어 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 몸무게도 줄이고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나를 뒤 돌아보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우리는 부모를 통해 몸과 정신을 부여 받았지만, 그 상태로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건 애벌레가 고치 기간을 통해 나비가 되듯이, 거북이가 알에서 깨어나 드넓은 바다로 나가듯이, 오래된 자아를 삭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중요한 시기가 바로 고통이다. 고통을 통해 인간은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고통을 피하기만 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기 전, 이기심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그럭저럭 연명한다. 자신이 주인 같지만, 사실은 쾌락과 편안함이 주인이 되어 나를 마음대로 움직이게 한다. 배철현 선생은 여러 글에서 말한다. 인간의 심연 속에는 신적인 불꽃이 숨어 있다. 그 불꽃에 불을 지펴, 빛으로 살지 못할 때, 우리는 죄인이 된다고. 그러니까 죄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식이고, 알더라도 최선을 경주하지 않는 게으른 자이다.

세 번째 질문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이다. 여기서 이웃은 나하고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고, 나와는 상관 없는 낯선 자 혹은 동물이나 식물이기도 하다.  낯선 자는, 내가 그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낸다. 그 본모습이 신이라고 배철현 선생은 말한다.  나의 사랑이, 그 낯선 자를 신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 때, 그 가운데 신이 등장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주변의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배철현 선생의 이 주장을 나는 늘 섬기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와 같았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도종환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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