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월 21일)

지난 18일에 오늘은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삶과 죽음에 대한 그 빛나는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은 제8장 "죽음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고향"을 읽고 여러 가지 사유를 해본다. 스승 이어령은 인생이란 파노라마가 아니라, 한 커트의 프레임이나,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 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일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2022년의 1월도 벌써 거의 다 지나간다. 코로나-19가 잡히지 않아 강요된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가 세상을 다 잠재우고 있다. 나는 나름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내가 할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건 틈나는 대로 <인문 일기>를 쓰는 일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발산이 되고, 그 양만큼 수렴하는 시간이 요구된다, 그만큼 독서와 관찰이 시간이 필요하다. 또 그 양만큼 안목과 시선이 높아지고, 세상에 대한 문해력이 늘어난다. 이게 일상의 소소한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또 그만큼 세상을 좀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되고 마음도 평화로워진다. 더 나아가, 사소한 일들이 쌓여서 인생이 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기쁨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나 만의 임무를 파악한 후, 일상에서의 초조함과 조급함이 사라졌다.
이게 삶의 성숙이 아닐까?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뀐다. 미래는 결정에 따라 바뀐다. 현재는 지금 행동하기에 따라 바뀐다. 바꾸지 않고 고집하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목표를 잃는 것보다 기준을 잃는 것이 더 큰 위기이다. 인생의 방황은 목표를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준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成熟)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고 보내는 시간들이 많다. 우리가 아프지 않고 산다면, 26년은 잠자고, 21년은 일하고, 9년은 먹고 마시지만, 웃는 시간은 겨우 20일 뿐이라 한다. 또한 화내는 데 5년, 기다림에 3년을 소비한다. 기쁨의 시간이 곧 웃는 시간이라고 본다면, 80 평생에 겨우 20일 정도만 기뻐하는 건 삶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화내는 시간을 줄이고, 웃을 수 있다면 삶이 더 아름다울 거다.
제목만 읽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읽기로 돌아온다. 스승은 "이익을 내려면 관심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고 하시는 스승에게 기자는 묻는다. "럭셔리한 삶이 무엇일까요?" 스승은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고 했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럭셔리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한다면 재미가 없다. 반면, 재미있어서 하면 저절로 이익도 된다. 영어 'interest'도 "관심, 재미'라는 뜻도 있지만, '이익, 이자'라는 뜻도 있다. 스승은 글을 쓰는 일이 평생의 'interest'였다 한다. 글을 쓰다면 '3관'이 작동한다고 했다. 그 '3관'이란 관심, 관찰 그리고 관계를 말한다.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나와의 관계가 생긴다는 거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대화'이다. 대화는 변증법적으로 함께 생각을 낳는 거다. 우리가 혼자 글을 써도 그 과정은 모두 대화이다. 내 안의 주체와 객체를 만들어서 끝없이 묻고 대답하는 거다. 자문자답이지만, 모든 생각의 과정은 대화이다. 또한 모든 텍스트는 다 빌린 텍스트이다. 기존의 텍스트에 반대하거나 동조해서 덧붙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상호성 안에서만 존재한다. 즉, 'inter'의 산물이다.
스승에 의하면,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애야 밥 먹어라'하는 것과 같은 거라 했다.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었다. 이젠 그만 놀고 오라는 부름이라고 보는 이유는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라는 거다.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거도 그런 이치가 아닐까? 죽음은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다. 그래 스승은 죽음은 낭떠러지가 아니라, 공향이라고 하시는 거다.

어제는 대전와인 스쿨 2기 강의가 시작되었다. 첫 강의 내가 맡았다. 문제는 강의실까지 무려 1시간 반을 걸어서 갔다는 거다. 처음에는 택시를 탈 요양으로 출발했는데, 길에 택시는 없고, 그곳에 가는 버스도 마땅치 않아 걷다가 그만 1시간 반이 걸어 갔다. 원래는 미리 가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일찍 나간 것인데, 그만 길에서 시간을 다 보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늘 아침 몸의 컨디션이 더 좋다는 거다. 그러니 걷는 것이 몸에는 최고라 생각한다. 나의 관심은 와인이었고, 그래 와인을 많이 관찰했다. 지금 와인과 삶의 관계에 대해 천착하고 있다.
아침 사진은 차를 타고 늘 지나가던 길을 걷다 보니 얻게 된 거다. 우리 동네 사인언스 콤플렉스 건물이다. 저렇게 소비는 에너지가 지구를 힘들게 하는 거다. 높고 밝은 세계는 정신의 빈곤을 가리킨다고 믿었다. 도시의 달동네, 꼬챙이를 타고 오르는 나팔꽃의 힘을 생각한다. 그늘 속 민중의 힘일 수 있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새벽빛은 어두운 곳을 먼저 찾아온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허만하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나머지 이어지는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그리고 스승은 인생이란 파노라마가 아니라, 한 커트의 프레임이라고 하셨다. 한 커트 한 커트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라 하셨다. '순간을 살라'는 말로 나는 받아들였다. 배연국 위원의 글을 공유한다. 그에 의하면, 인생(人生)이란 "사전적으로는 ‘사람(人)의 삶(生)'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람과 삶은 모두 동사 '살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살다의 어간 ‘살’에 명사형 조사 ‘암’이 붙어서 된 것이 사람이고, 명사형 음소 ‘ㅁ’이 붙어 탄생한 것이 삶이다. 그렇다면 사람과 삶은 일란성 쌍둥이인 셈"이라 했다. 그러면 배 위원은 "삶은 생존과 다르다. 진정한 삶은 죽음과 대척점에 있는 생존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보낸 것을 삶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한껏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라 말했다 한다. 그리고 로마 철학자 세네카도 삶이란 단순히 목숨을 유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치자.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누구나 바라는 장수가 오랜 인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세네카의 통찰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배 위원도 같은 이야기 한다. "바다에 사는 거북이는 200년을 살고 그린란드상어는 400년을 산다. 동물처럼 생명만 이어간다면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순 없다'면서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소개했다. "마음의 환기"를 위해 나열하고, 되새겨 본다.
• 몽테뉴는 “삶의 가치는 그 길이에 있지 않고 순간순간을 얼마나 알차고 유용하게 보냈느냐 에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내용과 결과에 따라 실제로는 얼마 살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 옛날 서당에선 ‘人人人人’을 벽에 붙여 놓고 사람의 의미를 깨우쳤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 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뜻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삶으로 바꿔 읽어도 손색이 없다 했다. "‘삶이면 다 삶이냐, 삶 다워야 삶이지.’
• 카뮈는 “눈물 날 정도로 혼신을 다해 살아라"고 충고했다 한다.
• 이준 열사는 “삶 중에도 죽음이 있고 죽음 중에도 삶이 있다”고 일갈했다 한다. 그러니 "삶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펄떡펄떡 살아 있는 삶이 있고, 늙은 삶이 있고, 병든 삶이 있고, 죽은 삶이 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은 목숨이 종료되는 죽음이 아니다. ‘죽은 삶'이다. 목숨은 붙어 있어도 죽어 있는 삶이다." (배연국)
늘 수첩에 적어 두고 기억하던 법정 스님의 몇 가지 '주옥 같은' 잠언들도 소환한다.
• 크게 버리는 것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버리고 비우려면 크게 버리고 비워야 한다.
•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 지, 둘을 갖게 되면 그 소중함 마저 잃는다. 하나를 가지고 소중하게 다 소진하고 그 다음 것을 사야 한다. 지나친 소비에 창피함과 죄스러움을 가져야 한다.
•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 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화장실에 적힌 교훈 같지만 천천히 읽으면 자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으며, 자유로운 사람은 두려워 하지 않는다. 알면, 당황하지 않고, 욕심이 없으면 근심이 없고, 알고 욕심내지 않는다면 두려울 것도 없다. 자유는 여기에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사람이며,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늘 배우고, 익히며, 일상의 기본을 잘 유지해야 존재가 풍성해지고, 녹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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