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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작은 소리, 순한 맛이 사라지고 있다.

1576.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3월 24일)

 

매주 수요일은 시대를 읽는 날이다. 오늘 아침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작은 소리, 순한 맛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소설가 장강명한테 배운 것이다. 평소에 나도 스나브로 빠져든 상황이다. 몇 일전에는 실비김치를 즐긴 적이 있다. 대전이 시작한 김치이다. 실비라는 말은 아마도 실비식당에서 나온 것 같다. 실비식당이란 음식을 저렴하게 손님에게 파는 곳이다. 실제로 드는 비용만큼만 음식 값으로 팔겠다는 말이다. 실비 보험이라는 말도 같은 어원 같다. 거품을 제거한 실제로 드는 비용으로 마진을 남기지 않는다는 뜻 같다. 대전의 실비식당에서 유래된 김치가 실비김치이다. 이 김치의 특징은 '매운 맛'이다.

 

이런 매운 맛을 즐기면, 기름기가 빠지거나 순한 맛의 다이어트 음식은 "종이 뭉치처럼"(장강경) 맛없게 느껴진다. 장강경 소설가에 의하면, 고추와 식물의 매운 맛을 표시하는 척도를 스코빌 지수라 한다. 1986년에 나온 신라면의 스코빌 지수가 2700 스코빌이었는데, 최근 라면은 스코빌 지수가 5000이 넘는다고 한다. 라면 뿐만 아니라 과자, 치즈, 족발, 소시지, 돈가스, 김치도 매운 제품들이 인기이다. 마라탕과 마라샹궈가 유행하더니 얼마 전에는 급기야 매운 도넛, 매운 우유까지 나왔다. 좀 더 기다리면 매운 탄산음료나 매운 [와인이나] 매운 술[소주]도 나올지 모른다고 소설가는 진단했다.

 

왜 우리는 매운 맛을 찾을까? 사람들은 세상이 살기 힘들어진 탓이라고 말한다. 무한 경쟁과 코로나 블루 등 점점 더 심해지는 스트레스를 매운 맛으로 풀려한다는 것이다. 장강명 소설가는 다르게 해석한다. "이런 종류의 경쟁은 한 번 시작되면 그 자체의 힘으로 굴러가게 되는 듯하다. 세상의 평화와 상관없이, 보다 강한 자극을 향해."

 

많은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그래 오늘 아침 시를 이제야 시인의 "피아노 조율법"을 공유한다. 소리 내어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 다음으로 미룬다.

 

피아노 조율법/이제야

 

 

사연이 점점

깊어지는 것보다

에피소드가 매일

많아지는 것이 나아

 

기념일은 어김없이 돌아오니까

 

어떤 이야기가 기념일이 되지 못하는 것은

혼자 깊어지기만 하기 때문이래

 

깊이를 어기는 쪽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버릇

 

어쩌면 남은 이야기들은

소리가 되기를 기다리는 소음일지 몰라

 

처음 겪는 일이야,

가장 쉬운 위로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차이를 주자

 

아파도 기념일이 되자

깊은 너보다 많은 우리가 되기 위해

마치 처음처럼

 

한 번도 조율된 적 없지만

오늘도 피아노를 조율하자

 

깊은 기념보다 많은 기념을 위해

 

 

음악을 새로 공부하면서도 나는 잘 몰랐는데, "악기는 음을 높여서 조율하면 대체로 소리가 밝고 화려해진다"(장강경)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높은 음으로 소리 크게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표준이 필요한 것을 나는 알았다. 우리 동네에는 표준과학연구소가 있는데, 왜 그게 있는지 잘 몰랐다. 서양 음악 계에서는 표준 조율 음을 정하기 전까지 '음 높이 인플레이션'이라는 현상이 있었다 한다. 연주자들이 조금씩 악기의 음을 높이는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장강경 소설가에 의하면,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작곡 당시의 악기 조율 방식과 연주 법으로 연주하면 지금 우리에게는 반 음 정도 낮게 들린다"고 한다.

 

표준이 필요하다. 매운 맛과 높은 음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보상을 받지만, 순한 맛과 낮은 음은 제대로 평가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맛과 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드라마나 영화, 시 등)의 세계에서 담백한 이야기도 순한 맛과 작은 소리의 처지와 비슷하다. 그래서 상업 영화의 폭력 묘사는 점점 더 잔혹해지고, TV 드라마의 막장 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심지어는 역사 드라마도 왜곡이 사해진다. 뿐만 아니다, 가요와 팝송도 평균 음량이 커질 뿐만 아니라 비트가 점점 더 강렬해진다.

 

"맵지 않아도 좋아요." "담백한 이야기가 좋아요." 이런 말은 듣기 힘들다. 사람들은 좀 더 자극적인 것만 찾는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들도 평균적인 말을 너무 심하게 이상한 소리로 비튼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장강명 소설가의 주장처럼, "다양성이 증가하는 것이라면 환영할 일이지만, 실제로는 표준에 대한 감각이 바뀌면서 매운 맛이 순한 맛을 쫓아내는 현상"이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치 영역에서 마찬가지이다. "막말을 일삼고 갈등을 부추기는 모리배는 카메라 앞에 자주 서게 되지만, 타협하는 신사는 이름을 알리지 못한다. " 내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가 장강명이 하는 말이지만 나도 동의한다. "2010년대 이후 용 꿈을 꾸는 한국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런 구조를 이해하고 '매운 맛' 경쟁을 벌였다. 언론도 거기에 퍽 협조적 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더 맵고, 자극적인 맛은 늘 유혹적 이다. 만드는 사람이나, 그 걸 먹고 즐기는 사람에게나 마찬가지 이다. 이 어려운 문제 앞에서, 장강명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한다. 답은 모른다. 사실을 우리는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를 변화 시키는 힘은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질문하는 곳에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해답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종류의 질문은 자신의 삶을 더 숙고하게 하는 질문을 유도할 뿐이다.종

(1) 매운 맛, 자극적은 것들의 경쟁이 어느 선을 넘으면 사람들이 그런 맛과 그런 것들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순한 맛과 담백한 것이 각광을 받는 때가 올까? 강강명 소설가는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애초에 우리의 눈, 코, 귀, 입이 불공정하다. 게다가 캡사이신으로 매운 맛을 내고 막말을 던지는 게 재료의 풍미를 살리고 정책을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표준 조율 음을 만들고, 영상물 상영 등급을 정하듯, 라면 맵기와 정치 문화에 대한 성문 규정을 마련해야 할까?

(3) 우리가 각자 감각 기관의 편향된 신호를 극복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

(4) 아니면 순한 맛에 보조금이라도 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