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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달나라의 장난/김수영

내가 꿈꾸는 인문정신

팽이는 자기 힘으로 돌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돌면 외부의 힘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열심히 돌아야 한다. 그게 내가 꿈꾸는 인문정신이다.

인문 정신은 당당하다. 모든 인문학은 고유명사의 학문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인문학자가 지향하는 것은 자신의 학문을 만드는 거다.

인문정신은 자신만의 몸짓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인문정신은 독재나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왜? 그것들은 거대한 팽이 놈이 자기를 중심으로 똑같이 돌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고 있는 팽이는 모두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돈다. 팽이는 똑같이 돌다 보면 결국 다 넘어진다.


달나라의 장난/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都會)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小說)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生活)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餘裕)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別世界)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機) 벽화(壁畵)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運命)과 사명(使命)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放心)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記憶)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1. 자기 스타일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게 살려면 감당하여야 한다. 나 스스로 주인으로 좌우지간 돌아야 한다. 팽이처럼, 나만의 스타일로.

2. 언어의 궁극적인 목적은 항상 침묵이고, 침묵은 실천이다. “너 말이 많아졌구나. 예전에는 말이 많지 않았는데.‘(<신라의 달밤)>

3. 나는 곧 없어질 존재이다. 그러니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인문정신이다.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인문정신이다.

4. 인문정신은 당당한 것이다.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사랑을 한다.”(김수영<죄와 벌>) 진짜 인문정신을 가져야 누굴 미워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5. 인문학의 특징은 주어가 ‘나’나 ‘너’까지이다. ‘우리’라고 쓰면 사회과학이다.

6. 인문정신은 “아파도 당당하다.” 대충 관념적으로 장난치지 말고 맞서야 한다. 그래서 인문학의 길은 아프다. 아파야 살아있는 것이다. 안 아프면 죽은 것이다. 삶은 원래 아픈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다 힘든데도 버티며 사는 것이다. 삶이 그렇게 아픈 것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자꾸 연어처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방향을 선택하면 강물에 휩쓸려 내려간다. 그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다. 왜? 죽은 물고기만 내려가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순응해야 하는 현실은 죽은 것이다.

7. 죽어 눈 감을 때 안식을 찾으려면 지느러미 질을 엄청스레 해야 한다. 그러면 죽을 때 편안해진다. 죽음이 안 무서워진다.

8. 천상천하유아독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