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반쪽이’ 이야기 (2): 서동욱 칼럼을 읽고 정리해 본다.
모든 관계는 어렵고 세심함을 요구한다. 남녀 관계 역시 당연히 그렇다. 남녀관계를 포함해, 모든 관계는 평생의 학습을 요구한다.
모든 관계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질문하며, 평생 추구해야 할 중요한 학습내용이다.
위의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잘라진 반쪽이는 다른 반쪽이를 그리워하며 계속 만나려 한다. 잃어버린 '전체'를 회복하려는 욕망으로서 관계를 이해하는 사고방식이다.
왜 홀로 있지 못하고 좋아하는 상대를 찾고 만나려 하는가? '개별적인 인간'으로 있지 못하고, '전체'에 들어가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보는 인간관이다. 자신이 전체라는 인간관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폭력은 개별적인 인간을 전체의 일부로 보고 있는데서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전체라는 허구 속에 단독자인 개별적인 인간을 억지로 집어넣으려 할 때 시작된다는 말이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개별자에게 참으라고 한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기 머릿속에 있는 지극히 사적인 생각, 자기만의 신념 등이 자신과 상대방, 즉 '전체'를 위한 절대적 가치라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은 전체를 대표하고, 전체를 이끄는 주연이며, 상대방은 이 전체에 기여해야 하는 조연이라고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상대방은 자기를 이해해 주어야 하는 입장이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 기여해 주어야 하는 입장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괴로운 일도, 결국 전체 모두에게(사실은 그 자신에게만) 좋은 즐거움, 적어도 용인돼도 괜찮은 쾌락이라고 착각한다.
우리는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별적인 인간으로 단독자이다. 전적으로 서로 다른 자들이, 각자의 고유함 때문에 합쳐질 수 없이 계속해서 서로 다른 자들로 남아 있어야 한다. 남녀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관계에서, 특히 남녀관계,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즈 조각들이며, 전체 그림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 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본성적 고집을 존중하여야 한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그냥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들뢰즈)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 앞의 한 사람을 순응시키려 하고, 자신의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모두와 다른 고유함'이라는 타인의 본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도는 결국 좌초하고 만다. 타인은 그가 있는바 그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각자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뇌두기, 이것이 자유인의 공동체가 제일로 삼는 평생교육이다.
우리는 모두가 고유한 자유인이다. 내가 개별자 아니 단독자로 있으려 하지 않고, 전체에 속하려 한다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가 오직 하나라는(유니크하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하게 우리 각자는 '아주'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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