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인간은 '사이'의 존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지,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서 있는 순간, 사건들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앞발이 손으로 변주되었기 때문이다. 땅에서 벗어난 손은 뭔가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손은 뇌로 연결된다. 손이 하는 모든 행동과 창조는 뇌신경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순간 얼굴이 탄생한다. 동물은 얼굴이 없다. 얼굴이 아니라 머리다. 미안하지만, 그냥 우리는 '대가리'라고 한다. 머리와 얼굴이 구분되는 건 인간 뿐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후두부의 발달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 얼굴은 곧 말이다. 인간은 직립하고, 관찰하고, 말을 구사한다. 이게 호모 사피엔스이다.
여기서 말은 곧 신(神)이다. 왜냐하면 말이 생기고, 한 대상에다 말로 이름을 주니 그게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창조 과정이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요한 복음이 이렇게 시작한다. 말씀이 곧 창조이다. 하늘이라는 말이 하늘을 창조하고, 바다라는 말이 바다를 창조한다. 이름을 부여하는 순간 세계는 그렇게 존재한다.
말은 어디에 있을까? 천지와 인간, 신과 피조물, 나와 너, 나와 그 사이의 안과 밖 사이에서 진동한다. 말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결정적인 매개체이다. 말이 없었더라면, 인간은 그저 각각의 지역에 묶인 채 개별적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데, 배철현 교수가 자신의 <묵상>에서 "언(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그 이야기를 좀 공유한다.
요한 복음의 첫 마디,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는 이 말은 "입을 통해 습관적으로 주절거리는 잡음이 아니라, 백뱅을 가능하게 한 천지개벽의 울림이며, 만물을 생존하게 만드는 격려이자, 그리고 자신이 할 일을 마치고 '다 이루어졌다'라고 십자가 위에서 던진 예수의 안도의 탄성이다."(배철현) 이젠 이 말이 이해가 된다.
배교수에 의하면, 그 말을 "고대 히브리 예언자들은 '다바르(dabar)'라고 불렀고,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logos)'라고 명명"하였고, "갠지스 강의 시인들은 '다르마(dharma)로 이 말을 가슴에 품었고, 중국인들은 '언'이라고 여겨, 입으로 나오는 소리로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였다" 한다.
말은 중요하다.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남의 말을 듣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배교수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은 자신의 말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감동적인 사건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 그 말을 '다바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단어에는,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서로 배타적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란 의미도 지니고, 그 말이 실행된 '사건'이란 뜻도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말은 잘 하고, 실천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즉 말이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건 말로 공수표를 쓴 것이다. 말이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타인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며 악이 된다.
못 배운 사람, 문명적이지 못한 야만적인 사람은 자신이 던진 말의 결과를 헤아릴 여유가 없을 정도로 어리석어, 자신이 우연히 경험한 이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고, 주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악취가 나는 험한 말을 서슴지않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은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조용하지만 변화무쌍한 자연과, 그 자연의 변화를 주도하는 시간의 특징은 침묵이다. 나는 다음 말을 좋아한다. "천하언재(天何言哉, 하늘이 언제 말하더냐!)"를 좋아한다. 그리고 "희언자연(希言自然, 간 말 없는 게 자연이다)"도 좋아한다. 그러니 "침묵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라는 문장도 옳다. 진리는 이 쪽에도 옳고 저 쪽에도 옳은 중간이다. 말은 자신의 침묵이 만들어낸 보석이어야 한다. 침묵을 통해 단련된 자신의 인격과 품격이 드러난 말은 자연스럽고 찬란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겐, 말(言)에 해당하는 '로고스(logos)'라는 개념이 있다. 로고스는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문법이다. 이를 동양 철학에서는 '도(道)'라고 한다. 나는 도를 '삶의 문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문법은 문자가 발명되고 더 중요해 졌다. 글 뿐만 아니라,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문법을 숙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문법이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과 행동, 즉 언행이 다듬어지지 않고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자란 뜻이다. 그런 사람은 누구로부터 지적 받아 자신의 잘못을 수정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문법이란 이타심에서 나온 상대방에 대한 배려하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의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를 말씀 대신 로고스라고도 한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에서 로고스는 인간 세상을 문법으로 움직이는 에너지이다. 그러니 말은 에너지인 셈이다. 인간은 두 발로 서면서 얼굴이 생기고 말을 하면서, 그 말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움직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우연한 경험을 기초한 생각은 타인을 부정하는 구별을 만들지만, 로고스를 통한 새로운 안목은 타인을 나의 일부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타인이 바로 나란는 깨달음을 선사하는 '구별된 공간'으로 나를 인도한다.
로고스를 인도에서는 '다르마'라고 한다. '다르마'란 산스크리트어가 중국으로 와 '법(法)'이 된다. 여기서 '법'이란 한 사회의 유지를 위한 법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기 위한 모두가 공감하는 삶의 이치이자 도리이다. '법(法)'이란 한자어를 풀면 수(水, 물)과 거(去, 가다)가 만나 만들어진 것이다. 법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만물은 흐른다. 말도 그렇다.
그런 흐름으로 말은 말을 낳는다. 말은 리듬과 파동을 수반하며, 소리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귀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따라서 말하기와 듣기는 하나이다. 그래서 태초의 인류에게 소리는 늘 신성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다섯가지 감각 중에서 가장 무딘 것이 '청각'이라 한다. 그런데 그 '귀'가 '트이면' 다른 감각기관으로는 느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래 황동규 시인은 "내 세상 뜰 때", 빗소리를 듣기 위해 귀만 그냥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이다. 귀를 열고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는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오늘 아침 사진 속에서도 소리가 들린다. 나는 가만히 그 못 가에 앉아 있었다.
풍장·27/황동규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태초의 인류에게 경전이란 무릇 소리를 타고 전파되는 신의 메시지였다.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신이 자신 안으로 들어온다고 느꼈다. 고미숙이 인용한 카렌 암스트롱이 쓴 <축의 시대> 일부를 다시 옮긴다. "찬가를 듣는 사람들은 계절이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별이 자기 갈 길을 벗어나지 않고, 농작물이 자라고, 인간 사회의 갖가지 요소들이 일관되게 결합하도록 돌보는 힘과 접한다고 느꼈다." 말하기와 듣기 안에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는 말하기와 듣기의 그 신성함을 잊고 산다. 사대 성인들의 진리는 다 말로 이루어져 있는 데도 말이다.
거짓말, 중상모략, 이간질, 욕지거리, 위선적인 말, 이런 말들이 해롭다는 것은 우리 모두 다 안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는 그런 말들을 금지하는 계율이 존재한다.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의 신성함을 복원하는 일이다. 여기서 신성함은 특별하고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적당한 때에 말하고, 사실을 말하고, 유익한 말을 하고, 가르침을 말하고, 계율을 말하고, 새길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고, 신중하고 이익을 가져오는 말을 때에 맞춰"(고미숙) 하는 것이다. 왜? 그런 말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어주기 때문이다. 그 신성함을 잃게 되면 그 말들이 세상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하고 싶은 말은 어떻게 하면 말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보다 말의 고귀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말이 세상 모두를 연결해 주는 것이라 점에서 고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가 아니면 단절시키는가 따져 볼 일이다.
그러다가 인류는 말 대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자가 탄생한 것이다. 이 문제는 내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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