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시간, 아름다운 공간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 없는 시, 공간은 균형이 깨진 '진짜' 삼각형이 아니다. 사람 혼자서는 틈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일상은 튼실하되, 시선은 고귀하게, 현실은 명료하되, 비전은 거룩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이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길이다.
그리고 서는 순간 우리는 걷기 시작한다. 서면 걷는다. 그래 직립과 보행은 동의어이다. 고로 삶은 걷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삶이란 내가 오늘 내딛는 수많은 걸음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걸음 씩 걸을 때마다 온 우주가 출렁인다. 그 걸음을 통해 온 우주가 나를 살리는 데 기여하지만, 동시에 나의 걸음이 온 우주를 출렁이게 한다. 우리는 이 걸음 속에서 울림과 떨림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설 수 없듯이, 사물은 어느 한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우리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유동성이 교감의 원천이다. 어릴 수록 더 잘 교감하는데, 어른이 되면, 교감이 아닌 분별, 공감이 아니 대립이 우세해 진다. 그래 동 서양의 현자들은 우리들에게 어린아이의 마음을 회복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글쓰기의 원리도 그런 것 같다. 사물을 '처음처럼' 만나고, 매 순간 차이를 발명해 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의 동력이다. 이건 인류가 처음 천지 '사이에' 섰던 태초의 신비로 돌아가는 길이고, 갓난 아기가 처음 세상과 만나는 그 순간을 일깨우는 길이기도 한다.
"생각을 생각하다."(고미숙) 생각도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생각이 형성되려면 일단 두 발로 서야 한다. 직립하면서, 인간의 두뇌 용량이 커졌다. 대신 골반은 수축된다. 그래 동물들과 달리, 여성의 임신기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자연스럽게 육아기간도 늘어났다. 임신, 출산, 육아의 전과정이 고단해 진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두 발로 서고자 했을까? 아마도 생각을 하고 싶어, 두뇌를 확장하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두뇌는 걷고 움직이고 사냥하고 먹고 마시고 떠들고 등등 하는 운동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 활동들과 함께 뉴런이 증식, 연접한다. 뉴런 자체가 연결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곧 연결인 것이다. 하늘과 땅, 이곳과 저곳, 오늘과 어제 그리고 내일을 연결하면서, 생각이 계속 증식된다. 그래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의 크기가 곧 존재의 크기가 되는 이치가 생긴다. 왜냐하면 운동이 생각을 만들어 내고, 다시 생각이 활동의 범위를 증식하는 방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걸 '사유의 탄생과 증식'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다가 우리는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생각이 구체적 현장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제는 거기에 추상의 경지를 더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은 질주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문명, 역사, 세계가 창조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아가 무한 팽창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말하는 자의식도 이때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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