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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새벽에 걷기/박진성

184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16일)

오늘 아침은 우연히 언젠가 저장해 두었던 배철현 교수의 <묵상>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요즈음 내 심정을 잘 이야기 해 주는 것이라 새롭게 리-라이팅하며 공부하고, 공유한다.

자신의 일상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 리더인 사람이다. 자신의 영혼을 다스려, 감동적인 하루를 보낼 수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다스리고 더 나은 자신을 수련하는 자는 하루라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시간만이 그를 변화하고 혁신 시킨다. 그런 리더의 하루는 확신과 환호가 아니다. 오히려 ‘주저’와 ‘오해’의 연속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요즈음 부쩍 드는 생각이다. 내가 잘 하고 있는가에 믿음이 흔들리고, 타인의 시선과 생각에 기웃거린다.

자신의 일상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시도해 보지 않는 길을 개척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여 무슨 일을 한 번에 결정하기를 주저(躊躇)한다. 주저는 다른 말로 하면 신중(愼重)이다. 그는 신중함을 통해, 더 깊이, 더 높이. 더 멀리서 세상을 관조한다. 그런 사람은 마치 독수리처럼, 더 높은 곳에서 현실을 파악하고,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것처럼, "어두운 숲속" 너머에 있는 "낙원"을 찾아낸다. 그런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발을 들어 놓은 적이 없는 "어두운 숲"이, 모두를 위한 지름길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혼돈으로 보이지만, 거기서 질서가 나온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주변 사람들은 거의 없다.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오해하고 배척한다.

자신의 일상을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주저(躊躇)한다. 그 심정을 미국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는 길>이란 시의 첫 단락에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노란 숲에 두 길이 갈라져 있었다. 내가 두 길다 갈 수 없어 아쉬웠다. 한 길 밖에 갈수 없는 여행자라 한참 서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저 밑까지 바라보았다. 그곳은 덤불길로 굽어진 장소였다.” 우리들의 일상은 자주 딜레마에 서게 된다. 이 길도 좋아 보이고 저 길도 좋아 보인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에게 유리한 길이 옳은 길이라고 주장한다.

리더와 일반 대중의 차이는 이런 것이다. 일반 대중은 자신의 의견을 빠르게 주장하지만, 리더는 모든 이들의 서로 다른 요구를 전부 들어줄 수 없기 때문에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리더는 연민(憐憫)한다. 연민을 품은 리더의 특징은 주저와 고민이다. 리더는 난제를 가지고 ‘한참 서 있는다’. 한참 보다. 이런 ‘한참보기’는 ‘대충보기’와 다르다. ‘대충보기’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을 통해, 자신에게 익숙한 대로 보는 행위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의견은 틀리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착각하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강요한다. ‘한참보기’는 고독과 침묵을 오랫동안 훈련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한참보기'라는 말이 흥미롭다.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는 거다. 이것 저것을 따져 보는 거다.

배철현 교수에 의하면, ‘한참보기’는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등장하는 영웅 아르주나의 궁술과 같다고 한다. 그의 스승인 드로나는 아르주나의 다른 네 형제에게 궁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드로나는 나무로 제작한 작은 새를 높은 나무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화살로 쏘아 떨어뜨리라고 말하였다. 드로나는 활을 쏘기 전에 다섯 명에게 묻는다. “무엇을 너는 보는가?” 형제들은 각각 나무의 웅장함. 가지의 풍성함, 자신과 나무와의 거리, 활과 화살의 견고함, 자신의 몸 상태, 새의 모양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드로나는 마지막으로 아르주나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아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새를 봅니다.” 그러자 아르주나가 다시 묻는다. “그러면 새가 어떻게 생겼는지 묘사해보아라!” 그러자 아르주나는 “저는 새의 모양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새의 눈만 보기 때문입니다.” 아르주나의 화살은 여지없이 새의 눈에 명중하였다. 리더는 주저를 통해 ‘새의 눈’이 자신의 눈에 들어올 때까지 저 깊은 ‘덤불 숲’까지 자세하게 보는 자이다. 나는 거기에서 멈추기를 싫어한다.

나는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길은 다녀서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길은 두 가지가 있다. 따라 가는 길과 새로 만들며 나아가는 길.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쉽고, 편하다. 그러나 없는 길을 내가 만들어가면서, 나아가는 길은 불안하고, 불편하고, 무섭고, 힘들다. 그러나 그런 길은 희망이다. 새로운 길을 나아갈 때, 희망이 없다면 나아갈 동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장자 식으로 하면, '도(道)는 행함으로써 완성된다'로 해석할 수 있다. 도라는 게 어차피 '말로는 못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하려면 행동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이다. '다닌다'는 행위는 곧 실천이다. 고민만 해서는 , 말만 해서는, 길이든 도이든 이룰 수 없다. 도전해야 한다.

우리가 행동을 주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 조르바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이 많아서', '나중에 욕먹을까 봐', '다른 게 더 좋아 보여서' 등등 일 수 있다. 한 스님에게 제자가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습니까?" "닦지" "어떻게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그거 남들도 다 하는데요?" "아니지. 남들은 밥 먹을 때 잡생각하고, 잠잘 때 오만 고민에 빠지지." 밥 먹을 때는 밥 맛있게 먹는 게 잘사는 거다. 잠잘 때는 잠 잘 자는 게 잘 사는 거다. 일할 때는 일만 하는 게 잘 사는 거다. 확실하지도 않은 내일 일을 걱정하느라 당장 잠을 못 이룰 필요 없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금은 소금도 아니고, 황금도 아니고 지금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일 필요 없다. 어찌할 수 없는 미래를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현재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모처럼, 어제는 시골 양반이 젊은이들이 노는 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일상의 리듬이 깨진 거다. 어떻게 잠자리에 들었는지 모르지만, 새벽은 여지없이 찾아왔다. 새벽은 하루의 첫 공기, 첫 햇빛으로 숨 쉬는 시간이다. 세상이 거짓 투성이고, 그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아, 아무것도 쳐다보기 싫은 눈이 되어 잠들거나 알코올에 찌든 폐로 잔 잠이 깨끗 해져서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는 시간이다. 새벽은 걸어가는 “나의 발에서 태어나는 나의 짐승”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하늘을 보면 드넓은 넓이만 한 하늘이 되고 녹조가 낀 강물을 보면 그대로 온몸이 폐수가 되는 시간이다.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시가 들어와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몸에 슬어 놓고 가는 시간이다.

새벽에 걷기/박진성

흉흉(凶凶) 같은 한자를 쳐다보는 일,
같아지는 일,
새벽이 되어서 새벽을
걷는 발에 육박할 것이다

나무가 바라보는 방향을 알 수 없어
나무는 걷는다
나무와 같아지는 일,
가로수가 많아서 길이 길어진다

세계좀비지도나 쳐다보는 일,
좀비는 못 되고 좀비 같아지는 일,
발이 낯설어지고 방향이 없어지고
그럴 때는 몸을 기울여봐
다른 새벽을 향해 엎드려봐
발자국들을 모으는 동안
보도블록에 앉아

더 먼 아스팔트를 바라보는 일,
아스팔트와 같아지는 일,
나는 저기를 걸을 것이다
저기, 짐승,
나의 발에서 태어나는 나의
짐승을 견딜 것이다

지난 주에 카카오톡에서 만난 글이다. 리-라이팅하여 공유한다. 어니 J. 젤린스키(Ernie J. Zelinski)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Dont hurry, Be happy)>>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말 중에 "어제가 역사(history)이고, 내일이 신비(mystery)라면, 오늘은 선물(gift)이다"가 있다.

그는 고민거리를 오직 두 가지로 나누었다. 우리가 걱정해 해결할 수 있는 고민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고민으로 나누었다. 예를 들어 내일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우산을 준비하면 된다.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은 자신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는 신에게 맡기는 거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걱정해 풀 수 있는 문제들만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으라는 거다.

그는 낙관론자도 아니고 비관론자도 아니라 했다. 그저 고민의 핵심을 정확히 스스로 파악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노력하는 쪽이라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어떤 고민이 있다고 치자. 머리를 싸매고 며칠 누워 있으면서 걱정을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가? 조용한 바닷가로 가서 며칠을 쉬면 방법이 생각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어떤 문제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10분도 안된다. 그는 무슨 걱정거리가 있다면, 그것을 종이에 적어보라. 틀림없이 서너 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그 몇 줄 안되는 문제에 대해 10분 안에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지신으로서는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 10분을 당신은 질질 고무줄처럼 늘려가면서 하루를 허비하고 한달을 죽이며 1년을 망쳐 버린다. 머리가 복잡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해결방안도 알고 있으면서 행동에 옮기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직을 당한 친구가 있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고 몇 개월을 고민하고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고민의 핵심은 간단하다. 취직이 안된다는 것이다. 왜 안될까? 경제가 어려워서? 천만의 말씀이다. 핑계를 외부에서 찾지 말라. 채용할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나온다. 채용할 만한 사람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앤드루 매터스는 <<마음가는 대로 해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공부를 하고
사람들을 사귀면서 최대한으로 노력하고 있는데도 인생에서 좋은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고민이 많다고 해서 한숨 쉬지 마라. 고민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 그대로 실행하라.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면 무시하라. 고민하나 안 하나 결과는 똑같지 않은가? 그러므로 고민은 10분만 하라. "인생은 자기가 상상한 모습대로 되고,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바로 그 사람이다."(파라셀수스) 정말인가?

밀턴 에릭슨은 두 번에 걸친 심각한 소아 마비를 자기 최면과 무의식의 힘으로 이겨낸 인간 승리의 모델이다. 나 자신도 그의 주장에 따라,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을 치유해 보고 싶다. 꿈이 좌절되어 겪는 아픔. 그는 무의식을 어떤 이상적 징후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문제 해결의 원천으로 생각한다. 어떤 첨단 심리학 이론이나 투약 처방보다도 환자의 무의식에서 가장 큰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당신 안에 이미 치유력이 있다"고 하며 무의식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렇다.

자신의 가장 큰 걱정거리를 자신도 모르게 적극적으로 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자기 암시를 끌어내, 의식화되어 있는 불리한 정보는 망각하고 무의식에 잠재된 유리한 정보는 끄집어 내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에는 확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 두가지 있다. 수렴적 사고는 새로운 이야기를 접해도 자신이 원래 알고 있는 이야기나 지식의 패턴으로 모든 외부 정보를 환원시켜 버린다. 반면, 확산적 사고는 다양한 분야로 상상력을 확장해 나간다. 가급적 확산적 사고로 내 안의 잠재력을 믿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상상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들 안에는, <<신데렐라>>의 '재투성이 신데렐라'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내 진심을 이해 받지 못하는 외로운 아이가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처럼 자존감을 잃지 않으리라. 나는, 그녀처럼, 남들이 아무리 나 자신을 초라하게 볼지라도 나 자신의 위대함을 끝내 믿을  것이다. "재투성이는 어떠한 환멸이라도 참고 견디는 오랜 기다림이고, 어떠한 굴욕도 견디어 내는 불굴의 자존심이며, 외부적 결핍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기고 참을성 있는 희망이다." (오이겐 드레이번,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 지금은 내 모습이 그녀처럼 '재투성이'이지만, 지금의 고통은 인생의 맷집을 키우고, 고통의 면역력을 키우는 시기이다. 앞으로의 고통에 대한 예방주사를 접종하는 시기이다.  아직 끝이 아니다. 내가 끝이라고 선택하는 그 순간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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