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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춤/박형준

1842.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지난 글들을 보다가, 사돈이라는 말을 만났다. 한문으로는 이렇게 쓴다. 査頓. 한문이었다는 것도 잘 몰랐다. '사돈(査頓)'이라는 말의 유래가 재미있었다. 이 말은 12C 고려 예종(睿宗) 때 생겨났다고 한다. 사연은 이렇다. 당시 무신(武臣)인 윤관(尹瓘)과 문신(文臣)인 오연총 (吳延寵)의 자녀들이 혼인을 함으로써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당시 윤관이 원수(元帥)가 되고, 오연총이 부원수가 되어 17만 대병을 이끌고 북방 여진족 정벌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정복지에 9성을 설치하고 개선하였다. 그 공로로 윤관은 문하시중(종1품 수상급)이 되고 오연총은 참지정사 (종2품 재상급)가 되어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지기(知己)가 되었고 자녀를 혼인까지 시켰다. 둘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시내를 가운데 두고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 종종 만나 회포를 풀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윤관 댁에서 담근 술이 잘 익어 오연총과 한잔 나누고 싶어 하인에게 술통을 지워 오연총 집에 가려고 냇가에 당도했는데, 갑자기 내린 폭우로 냇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때 냇물 건너편에서 오연총도 하인에게 술통을 지워 가지고 오다가 윤관이 물가에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물었다. “대감, 어디를 가시려는 중이오?" “아, 네에 술이 잘 익어 대감과 한잔 나누려고 나섰는데 냇물이 많아 건너지 못하고 이렇게 서 있는 중이라오."

그리하여 피차 술통을 가지고 오기는 했는데 냇물이 불어나 그냥 돌아서기가 아쉬워 오연총이 윤관에게 말했다. “냇물을 건너지 못해 술을 한 잔 나누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아쉽군요!" 그러자 윤관이 웃으며 말했다. “대감! 우리 이렇게 합시다. 내가 가지고 온 술은 대감이 갖고 오신 술로 여기고, 대감이 가지고 오신 술은 내가 갖고 온 술로 여기시고 각자가 술잔을 들고 '한 잔 합시다!'하고 권하면, '한 잔 듭시다!'하면서 술을 마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오연총도 그 말에 흔쾌히 찬동하고 주위에 있는 통나무 등걸 査(사)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편에서 '한 잔 드시오!'하며 잔을 들고 머리를 숙이면(頓首(돈수), 저 편에서도 '한 잔 드시오!'하고 머리를 숙이면서 반복하기를 거듭하여 가져간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헤어졌던 것이다.

그 후 조정의 고관들에게 그 일이 풍류화병(風流畵屛), 즉 "멋진 얘기꺼리"로 알려져서, 그 후 서로 자녀를 혼인시키는 것을, 사돈맺기(査頓맺기ㅡ 통나무에 앉아 서로 머리를 숙여가며 술을 권하고 마시는 사이 맺기) 라는 말로 회자 되었다. 오늘날의 《사돈》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고사에서 탄생된 것이다.

내년에는 사돈이라는 말이 나오게 했던 두 인물처럼, 여유롭게 살기로 다짐한다. 인하대 박혜영 교수의 <금요인문학>에서 만난 생각이다. 우리 사회는 강한 것을 갈망한다. 승리, 성공, 권력 등등. 나는 이런 강자들의 반대편에 있는 약한 것들, 가령 고요함, 익명성, 실패에 따라붙는 낙인, 이런 것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이 문장이 마음에 들었다. "새는 제 아무리 보 잘 것 없는 참새라도 시간이 주어진 동안에는 열심히 살고, 때가 되면 아무런 자기 연민 없이 뚝 떨어져 버린다. 미련 없이 대지 위로 말이다."

나이에 비해 젊게 살려면, 여러 가지 규칙이 있어야 한다. 제일 먼저, 성격이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매우 정직하여야 한다. 두 번째는 노욕(老慾)을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어떤 것에 너무 집착하거나 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런 노인은 큰 자제력, 아니 절제하는 힘을 가져야 한다. 세 번째는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 가져야 한다. 네 번째는 그들은 책 읽기와 쓰기를 한다. 이것은 외활동을 위해 중요하다. 노년기에 가장 무서운 재앙이 치매이다. 다섯 번째는 계속적인 운동이다. '걷기'가 좋다. 그러면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고, 건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폭풍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퍼붓는 비 속에서 춤 추는 것을 배우는 거다. 진부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안무를 갖지 못한다. 자신만의 춤을 추지 못한다. 이 이유는 인간의 귀가 다른 삶들의 평가와 인정에 목말라 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자신이 만들어낸 삶에 달려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써 놓은 책이나 관습에서 삶의 기술을 배우지 않는다. 남들의 생각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자유를 아는 사람이다. 남의 것이나 따르는 삶이 계속되는 한 자신만의 고유한 문법을 만들어내는 참신한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 진부는 우리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하는 끔찍한 훼방꾼이다. 썩은 고기를 믿지 말고, 버리고, 도끼로 치듯 과거와 단절하여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는 광산 사업의 파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춤을 춘다. 그 춤은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으로 비친다. 그리고 그 춤속에는 해방이 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판단한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 가가 시작되는 느낌의 해방을 엿볼 수 있다. 억압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해방이 아니다. 지나치게 믿고 기대하고 희망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남 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다.

춤/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 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리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인다
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 놓으며
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 길 절벽 아래
꽃 파도가 인다

계절이 깊은 겨울로 치닫는다. 그럴수록 나는 순리(順理)에 따를 생각이다. 우리는 종종 땀보다 돈을 먼저 가지려하고, '설렘'보다 '희열'을 먼저 맛보려 하며, 베이스캠프보다 정상을 먼저 정복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노력보다 결과를 먼저 기대하기 때문에 무모해지고 탐욕스러워지며 조바심 내고, 빨리 좌절하기도 한다. 자연은 봄 다음 바로 겨울 맞게 하지 않았고, 뿌리에서 바로 꽃을 피우지 않게 하였기에 오늘 땅위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했고, 가을에는 어김없이 열매를 거두게 했다. 만물은 물 흐르듯 태어나고 자라나서 또 사라진다. 자연은 이렇게 말해 준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기다림은 헛됨이 아닌 과정이라고 말이다.

아직 한 해의 프로젝트들의 결과 보고서가 마쳐지지 않아 마음의 짐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걸 짐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 될 것이고, 마무리가 되면, 기다렸다가 또 다시 시작하는 거다. 자연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리 울었나 보다"라고 했던 것 같다. 꽃 한 송이를 피워내는 데도 계절의 변화와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세상만사 모든 일에 순리(順理)'를 따르면 삶의 가치가 더욱 밝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 세상에는 변치 않는 게 없고,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없고, 지금 가진 것을 영원히 누릴 수도 없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버릴 줄 알아야 꽃은 다시 핀다. 우리의 모남이 다소 둥글게 변하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 이를 위해 틈나는 대로 글을 쓴다. 쓰기는 삶을 살리는 행위이다. 이를 '양생(養生) 술(術)'이라 한다. <<장자>> 제3편 '양생주' 편이 생각 난다. 제3편 '양생'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일상 생활을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하게 살아가는가를 보야 주고 있는 것이다. 세 가지이다. 신나고, 활기차고, 풍성한 삶의 모습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거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식욕, 자존심, 자기중심주의 같은 일체의 인위적, 외형적인 것을 넘어서서 자연의 운행과 그 리듬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할 때, 우리 속에 있는 생명력이 활성화하고 극대화해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 이른바 '기대지 않는 삶(無待)'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북돋는 일(양생養生)',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양생(養生)의 주, 즉 생명을 북돋우는 요체인가 생주(生主)를 양(養)함, 곧 생명의 주인 혹은 생명의 요체를 북돋움인가? 생명을 북돋우면 생명의 주인도 북돋게 되는 것이니 둘 다 맞다.

글쓰기는 수렴과 집중을 하는 일이다. 이건 카오스에서 차서(次序)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난 처서라는 말을 좋아한다. 실제로 우주는 우아한 코스모스(cosmos, 질서)가 아니라, 좌충우돌, 천방지축의 카오스(chaos, 혼돈, 무질서)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끊임 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는 방향도, 목적도 없다. 변화 자체만이 유일한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태양계의 중심 별인 태양은 지금도 계속 폭발 중이라고 한다.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으로 현재 50 억 살쯤 된다. 50억 년쯤 뒤에는 완전히 폭발해 은하계로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당연히 태양계에 속한 지구 역시 그럴 것이다. 거기다 23,5도 기울어져 갸우뚱한 상태로 자전과 공전을 하느라 바쁘다. 계절은 끊임없이 돌아오지만 단 하루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한 적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흐름에 차서(次序)와 리듬을 부여한 것이 역법이다. 차서와 리듬, 새롭게 다가오는 단어이다. 그 역법은 1년, 4계절, 360일, 황도, 24절기, 72 절후 등등이다. 이런 척도가 없다면 어떻게 매일, 매년, 일생이라는 주기가 탄생하겠는가? 시간과 공간의 원리이다. 차서의 다른 말이 목차인데, 좀 엄밀하게 말하면, 차례(次例)와 질서(秩序)가 합쳐진 말이다. 순서 있게 벌여 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서 돌아오는 기회를 말한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개념이다. 이 연말에 나는 사는 일에 차서를 붙이는 시간으로 정하고, 조용하게 보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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