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운동가의 시 하나, 사진 하나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인연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모든 것은 직접적인 원인(因)과 간접적인 조건(緣)이 만나서 생긴 것이고, 당연히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이 헤어지면 모든 것은 소멸한다. '있는 그대로', 여여(如如)하게 보는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공(空)으로 보기에 그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본다. 그러나 인간 대부분이 여여(여여)하게가 아니라, 무엇인가 색안경을 끼고 본다. 불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가안 나가르주나(나가=龍, 아가르주나=樹, 용수)의 사상은 '공'이다. "어떤 존재도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인연이라는 말에서 중요한 것은 '인'보다 '연'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발생하면, 간접적인 조건인 '연'은 내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처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치열한 자기수행이라는 원인과 좋은 스승이라는 조건이 갖추어 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살아서 인간이 살아낼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아침에 공유하는 시의 "성에 꽃"도 그렇다. 성에 꽃은 방 안의 습기와 당시의 온도가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특정한 온도나 특정한 습기가 변하면 지금 보고 있는 성에 꽃이 사라지듯이, 인연이 맞아서 무엇인가 생기는 것이고, 인연이 다해서 무엇인가가 소멸할 뿐이다. 이 것이 ‘공’이론이다. "성에 꽃" 자체에는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
성에꽃/최두석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설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탓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 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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